수학 개념 지도
인물

아이작 뉴턴(Isaac Newton)

영국의 수학자·물리학자. 유율법(미분⁠, differentiation⁠)과 일반화된 이항급수⁠(binomial series)⁠를 만들고, 『프린키피아』에서 운동 법칙과 만유인력으로 행성의 궤도⁠(orbit)⁠를 설명했다.

(1+x)α=1+αx+α(α−1)2!x2+α(α−1)(α−2)3!x3+⋯(1+x)^{\alpha} = 1 + \alpha x + \frac{\alpha(\alpha-1)}{2!}x^2 + \frac{\alpha(\alpha-1)(\alpha-2)}{3!}x^3 + \cdots

아이작 뉴턴은 1643년 1월(당시 영국이 쓰던 율리우스력으로는 1642년 성탄절) 잉글랜드 링컨셔의 시골 마을 울즈소프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기 몇 달 전에 죽었고, 어머니가 재혼해 떠나면서 세 살의 뉴턴은 외할머니 손에 자랐습니다. 1661년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에 들어갔을 때 대학의 교과는 여전히 아리스토텔레스였지만, 그는 데카르트의 『기하학』과 옥스퍼드의 수학자 존 월리스가 쓴 『무한 산술』을 혼자 읽었습니다. 갈릴레이와 케플러가 남긴 질문, 곧 움직이는 것을 어떻게 수로 다룰 것인가가 그 시대의 문제였습니다.

굵은 막대가 이 사람의 생애이고, 흰검은 점은 페이지 끝 연표에 적은 일들입니다. 가는 막대는 같은 시대를 산 이 위키의 인물들입니다. 나이를 끌어 보세요.

나이 세 ·

1665–66년 역병으로 대학이 문을 닫자 뉴턴은 고향에 머물며 평생의 밑천이 된 생각들을 한꺼번에 만들었습니다. 그는 곡선을 움직이는 점의 자취로 보고, 흐르는 양 x(유량)가 변하는 빠르기를 유율⁠(fluxion)⁠ x˙\dot x라 불렀습니다. 오늘날의 미분입니다. 같은 무렵 그는 (1+x)α(1+x)^\alpha의 전개를 지수 α가 분수나 음수일 때로 넓혔습니다(위의 식). α가 자연수⁠(natural number)⁠이면 (1+x)2=1+2x+x2(1+x)^2 = 1 + 2x + x^2처럼 이항계수⁠(binomial coefficient)⁠를 계수로 하는 유한한 식으로 끝나지만, α=12\alpha = \tfrac12처럼 자연수가 아니면 같은 규칙으로 만든 계수가 끝없이 이어집니다. 1+x=1+12x−18x2+⋯\sqrt{1+x} = 1 + \tfrac12 x - \tfrac18 x^2 + \cdots가 그 예이고, x가 −1과 1 사이이면 항을 더할수록 참값에 다가갑니다. x = 0.21이면 처음 세 항이 1+0.105−0.0055=1.09951 + 0.105 - 0.0055 = 1.0995로 1.21=1.1\sqrt{1.21} = 1.1에 벌써 가깝습니다. xkx^k 꼴의 항 하나 아래의 넓이⁠(area)⁠는 xk+1/(k+1)x^{k+1}/(k+1)로 쉽게 구해지니, 이 급수⁠(series)⁠를 한 항씩 넓이로 바꾸면 원이나 쌍곡선⁠(hyperbola)⁠ 아래의 넓이가 급수로 나오고, 넓이를 구하는 일과 변화율을 구하는 일이 서로 거꾸로라는 미적분의 기본정리⁠(fundamental theorem of calculus)⁠가 계산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프리즘으로 햇빛을 나누는 실험과 중력에 대한 생각도 이때 시작되었습니다.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중력을 생각했다는 이야기는 노년의 뉴턴이 직접 들려준 것으로 전하지만, 머리에 사과가 떨어졌다는 대목은 나중에 붙은 것입니다.

1669년의 원고 『해석에 관하여』에는 방정식의 근을 차례로 다듬는 방법이 예제와 함께 실려 있습니다. x3−2x−5=0x^3 - 2x - 5 = 0의 근이 2 근처라고 보고 x=2+px = 2 + p를 넣으면 p3+6p2+10p−1=0p^3 + 6p^2 + 10p - 1 = 0이 됩니다. p가 작으니 제곱 이상을 버리면 p≈0.1p \approx 0.1이고, 같은 일을 되풀이하면 2.0945…로 빠르게 다가갑니다. 곡선을 그 점의 접선⁠(tangent line)⁠으로 바꿔 푸는 국소 선형성⁠(local linearity)⁠의 생각이고, 1690년 영국의 조지프 랩슨이 더 쓰기 편하게 다듬은 이 절차가 오늘날의 뉴턴 방법⁠(Newton's method)⁠입니다. 뉴턴은 이 원고를 출판하지 않고 스승인 케임브리지의 수학 교수 아이작 배로를 거쳐, 수학자들의 편지를 중개하던 런던의 존 콜린스에게 돌렸고, 그해 배로의 뒤를 이어 루커스 석좌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 무렵 런던에는 새로운 무대가 생겨 있었습니다. 내전과 크롬웰의 공화정이 끝나고 왕정이 돌아온 1660년 학자들이 모임을 시작했고, 1662년 찰스 2세의 칙허로 왕립학회가 정식으로 세워졌습니다(왕립학회). 학회는 권위보다 실험으로 따지자는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의 이상을 내걸었고, 서기 올덴부르크는 유럽 곳곳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1665년 첫 과학 학술지 『철학 회보』를 창간했습니다(편지 공화국). 1671년 뉴턴이 직접 깎아 만든 반사 망원경이 학회에 보내지면서 그의 이름이 처음 런던에 알려졌지만, 학회의 실험 책임자 훅과의 날카로운 다툼도 이때 시작되었습니다. 1679년 훅은 편지에서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끌림을 받는 물체가 어떤 길을 그리는지 물었습니다. 뉴턴은 짧게 답하고 말았지만, 뒤에 이 편지가 타원⁠(ellipse)⁠ 궤도의 증명을 찾게 한 계기였다고 핼리에게 털어놓았습니다. 같은 역제곱의 실마리는 하위헌스가 앞서 구한 원운동에 필요한 힘의 식에, 케플러의 셋째 법칙을 넣기만 해도 이미 들어 있었습니다. 『프린키피아』가 나올 무렵 훅이 역제곱 법칙의 우선권을 주장하자, 뉴턴은 원고에서 훅의 이름을 여러 군데 지워 버렸습니다.

1684년 천문학자 에드먼드 핼리(핼리 혜성에 이름을 남긴 사람)가 케임브리지로 찾아와,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힘을 받는 행성은 어떤 길을 그리느냐고 물었습니다. 뉴턴은 타원이라고, 이미 계산해 두었다고 답했다고 드무아브르가 뒤에 전합니다. 그 계산을 다시 쓰기 시작한 것이 1687년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프린키피아)가 되었습니다. 세 운동 법칙과 만유인력 하나로 케플러의 세 법칙(행성은 태양을 한 초점으로 하는 타원을 돌고, 같은 시간에 같은 넓이를 쓸고 지나가며, 공전 주기⁠(period)⁠의 제곱이 궤도 긴반지름의 세제곱에 비례한다), 달의 운동, 밀물과 썰물, 극 쪽으로 납작한 지구의 모양까지 설명했습니다. 책은 유율의 기호 대신 기하학의 언어로 쓰였지만, 그 밑에는 그가 '최종 비'라 부른 것, 곧 두 양이 함께 0으로 줄어들 때 그 비가 다가가는 값이라는 극한⁠(limit)⁠의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서로 당기는 두 물체의 운동은 깨끗이 풀렸지만, 태양·지구·달처럼 세 물체가 서로 당기는 운동은 끝내 일반적인 공식으로 풀리지 않았습니다. 이 삼체 문제⁠(three-body problem)⁠는 200년 뒤, 처음 조건이 아주 조금만 달라도 결과가 크게 갈라지는 혼돈⁠(chaos)⁠의 발견으로 이어집니다. 뜨거운 물체가 식는 빠르기가 주변과의 온도 차에 비례한다는 냉각 법칙(1701)은 가장 단순한 선형 미분방정식⁠(linear differential equation)⁠의 예로 지금도 교과서에 나옵니다.

『프린키피아』의 인쇄비는 핼리가 제 주머니에서 댔습니다. 왕립학회가 물고기의 역사를 다룬 책을 내느라 돈을 다 써 버린 참이었습니다. 책은 영국에서 곧 권위를 얻었지만 대륙의 반응은 달랐습니다. 파리의 학자들은 빈 공간을 건너 멀리서 끌어당기는 힘을 중세의 '신비한 성질'이 되살아난 것으로 보았고, 하늘을 채운 물질의 소용돌이가 행성을 실어 나른다는 데카르트의 설명을 더 좋아했습니다. 결판은 지구의 모양에서 났습니다. 뉴턴의 이론은 지구가 극 쪽으로 납작하다고 했고, 파리 천문대의 카시니 가문이 잰 자오선⁠(meridian)⁠ 측량은 오히려 극 쪽으로 길쭉하다고 했습니다. 1736–37년 파리 아카데미가 수학자 모페르튀이를 북극권 가까운 라플란드로 보내 위도 1도에 해당하는 자오선의 길이를 재자 극 쪽이 납작하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작가 볼테르가 『철학 서한』(1734)으로 뉴턴을 프랑스에 알렸고, 그의 벗인 수학자이자 물리학자 에밀리 뒤 샤틀레가 옮기고 해설을 붙인 『프린키피아』의 프랑스어판은 그녀가 죽은 뒤인 1759년에 나와 지금도 표준 번역으로 쓰입니다.

뉴턴은 겉으로는 국교회 대학의 교수였지만 속으로는 삼위일체 교리를 믿지 않았습니다. 트리니티 칼리지의 펠로는 성직자가 되어야 했는데, 그는 1675년 왕의 특별 허가를 얻어 루커스 석좌 교수는 서품을 받지 않아도 되게 했습니다. 그의 신학 원고는 평생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1687년 가톨릭 신자인 제임스 2세가 케임브리지에 베네딕트회 수도사에게 학위를 주라고 압박하자 뉴턴은 대학 편에서 이를 막는 데 앞장섰고, 이듬해 명예혁명으로 왕이 쫓겨난 뒤 1689–90년 대학을 대표해 의회에 나갔습니다.

뉴턴은 발견을 오래 감추는 사람이었습니다. 빛과 색에 관한 첫 논문(1672)이 훅의 비판을 받은 뒤로는 더욱 그랬습니다. 1676년 올덴부르크를 거쳐 라이프니츠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유율법⁠(method of fluxions)⁠의 핵심은 철자를 뒤섞은 암호문⁠(ciphertext)⁠으로만 적었습니다. 라이프니츠가 1684년 먼저 미분법을 출판하자 누가 먼저인가를 두고 다툼이 벌어졌고, 1712년 왕립학회는 뉴턴의 손을 들어 주는 보고서를 냈는데 그 초안을 학회장 뉴턴이 직접 썼습니다. 오늘날에는 두 사람이 각자 발견했다고 봅니다. 1696년 스위스 바젤의 수학자 요한 베르누이(야코프 베르누이의 동생)가 유럽의 수학자들에게 던지고 이듬해 다시 알린 최단 강하선⁠(brachistochrone)⁠ 문제를, 1697년 1월 뉴턴이 하룻밤 사이에 풀어 이름 없이 보냈고, 베르누이는 발톱을 보고 사자를 알아보았다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합니다. 최단 강하선 문제는 높이가 다른 두 점 사이에 미끄럼틀을 놓을 때, 마찰 없이 미끄러지는 구슬이 가장 빨리 내려가는 곡선을 찾는 문제입니다. 답은 곧은 직선이 아니라 사이클로이드⁠(cycloid)⁠이고, 이처럼 어떤 양을 가장 작게 하는 곡선을 찾는 수학이 변분법⁠(calculus of variations)⁠으로 자랐습니다.

1696년 뉴턴은 케임브리지를 떠나 런던의 조폐국으로 갔습니다. 낡은 은화를 새로 찍는 일을 감독하고 위조범을 직접 추적했으며, 1699년부터 죽을 때까지 조폐국장을 지냈습니다. 1703년 왕립학회장이 되었고, 1704년의 『광학』 부록에서야 유율법을 처음 출판했으며, 1705년 기사 작위를 받았습니다. 그는 연금술과 성서 연대기 연구에도 수학만큼 많은 원고를 남겼습니다. 1727년 여든넷으로 죽어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습니다.

런던 시절의 그는 나라의 문제와도 씨름했습니다. 바다 위에서 배의 경도를 알아내는 일은 해상 무역과 해군의 사활이 걸린 문제였고, 1675년 그리니치 천문대가 세워진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달이 별들 사이를 움직이는 모습을 하늘의 시계로 삼아 경도를 알려면 달의 위치를 아주 정밀하게 예측해야 했는데, 태양과 지구가 함께 당기는 달은 뉴턴에게도 가장 골치 아픈 문제였습니다. 그는 1690년대에 초대 왕실 천문관 플램스티드에게 관측 자료를 거듭 요구했고, 두 사람의 사이는 틀어져 1712년 뉴턴과 핼리가 플램스티드의 동의 없이 그의 별 목록을 출판하기에 이르렀습니다. 1714년 경도를 찾는 방법에 큰 상금을 거는 경도법이 의회를 통과할 때 뉴턴은 증인으로 나와 여러 방법의 어려움을 설명했습니다. 경도 위원회의 돈은 결국 시계공 해리슨의 정밀 시계와, 오일러의 달 이론을 바탕으로 한 독일의 천문학자 토비아스 마이어의 달 표 쪽으로 나뉘어 돌아갔습니다.

우선권 다툼은 뉴턴의 추종자들이 불을 댕기고 뉴턴이 뒤에서 지휘한 싸움이었습니다. 그 여파로 영국은 뉴턴의 점 기호를 한 세기 넘게 지켰고, 대륙에서는 베르누이 형제와 오일러가 라이프니츠의 기호로 해석학⁠(mathematical analysis)⁠을 넓혔습니다. 운동 법칙을 "힘 = 질량 × 가속도"라는 미분방정식⁠(differential equation)⁠으로 적어 문제마다 풀 수 있게 만든 것도 오일러였고, 라그랑주와 라플라스는 행성들이 서로 당겨 생기는 어긋남을 계산해 뉴턴의 체계를 완성해 갔습니다. 테일러 급수⁠(Taylor series)⁠에 이름을 남긴 브룩 테일러와 스코틀랜드의 콜린 매클로린 같은 뛰어난 후계자가 있었는데도 영국의 해석학은 대륙에 뒤처졌고, 1812년 케임브리지의 학생 배비지, 뒷날 천문학자가 되는 존 허셜, 대수학자 조지 피콕이 해석학회를 만들어 대륙의 d 기호를 들여오자고 나서고서야 흐름이 바뀌었습니다. 그들이 1816년 영어로 옮긴 프랑스의 수학자 라크루아의 미적분⁠(calculus)⁠ 교과서가 그 첫걸음이었습니다.

이어지는 곳. 유율법은 오늘날 변화율을 함수⁠(function)⁠로 모은 도함수⁠(derivative function)⁠, 합성한 함수의 변화율을 곱으로 구하는 연쇄법칙⁠(chain rule)⁠, 넓이를 구하는 정적분⁠(definite integral)⁠으로 남았고, 이항급수는 함수를 거듭제곱의 끝없는 합으로 펼치는 테일러 급수의 한 예입니다. 떨리는 줄의 짧은 한 조각에 '힘 = 질량 × 가속도'를 쓰면 파동방정식⁠(wave equation)⁠이 나옵니다. 뉴턴 방법을 복소수⁠(complex number)⁠에서 돌려, 출발점마다 어느 근에 다다르는지로 평면을 색칠하면 색의 경계가 아무리 확대해도 복잡한 무늬(프랙털⁠, fractal⁠)가 됩니다. 망델브로 집합⁠(Mandelbrot set)⁠과 같은 종류의 그림입니다. 접선을 따라 근을 찾던 생각을 '기울기⁠(slope)⁠를 따라 내려가 가장 낮은 곳 찾기'로 바꾸면 경사 하강법⁠(gradient descent)⁠과 최적화⁠(optimization)⁠가 됩니다. 결정론⁠(determinism)⁠의 꿈이 어디까지 가능한지는 라플라스와 푸앵카레의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곡선을 접선으로 바꿔 푸는 생각은 선형화⁠(linearization)⁠에, 끝나지 않는 급수로 값을 다가가는 생각은 근사와 오차에 모았습니다.

관계.

가운데가 이 사람, 둘레가 이어진 인물들입니다. 선의 색은 관계의 종류(초록 스승·제자, 파랑 함께 연구, 보라 편지, 빨강 논쟁, 주황 영향)이고, 다른 인물의 페이지에 적힌 관계도 함께 모았습니다.

  • 논쟁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 — 1712년 왕립학회의 우선권 보고서 초안을 학회장 뉴턴이 직접 썼고, 다툼은 영국과 대륙의 수학을 한 세기 동안 서로 다른 기호와 전통으로 갈라놓았습니다.
  • 영향을 받음 갈릴레오 갈릴레이 — 『프린키피아』는 떨어지는 물체와 던진 물체에 관한 갈릴레이의 결과를 운동 제1·2법칙으로 얻을 수 있는 예로 들며 그의 이름을 적었습니다.
  • 영향을 받음 르네 데카르트 — 학생 시절 혼자 읽은 데카르트의 『기하학』에서 곡선을 식으로 다루는 법을 익혔고, 『프린키피아』 2권에서는 데카르트의 소용돌이 이론을 반박했습니다.

연표.

  • 1661년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에 들어가다
  • 1665년 역병으로 대학이 닫힌 동안 고향에서 유율법과 이항급수를 만들다
  • 1669년 원고 『해석에 관하여』를 돌리고, 배로의 뒤를 이어 루커스 석좌 교수가 되다
  • 1672년 반사 망원경으로 왕립학회 회원이 되고, 빛과 색에 관한 논문을 내다
  • 1675년 왕의 특별 허가로 성직 서품 없이 교수 자리를 지키다
  • 1679년 훅의 편지를 받고 역제곱 힘 아래의 궤도를 생각하다
  • 1684년 핼리의 방문을 받고 행성 궤도 계산을 다시 정리하기 시작하다
  • 1687년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프린키피아)를 내다
  • 1689년 명예혁명 뒤 케임브리지 대학을 대표해 의회에 나가다
  • 1696년 런던으로 옮겨 조폐국에서 일하기 시작하다
  • 1699년 조폐국장이 되다
  • 1703년 왕립학회장이 되다
  • 1704년 『광학』을 내고, 부록에서 유율법을 처음 출판하다
  • 1712년 라이프니츠와의 우선권 다툼에서 왕립학회 보고서를 직접 쓰다
  • 1714년 경도법을 심의하는 의회 위원회에 증인으로 나서다

이 인물이 나오는 긴 글

미분에서 회전까지 · 1편 · 미분 순간의 속도 속도계는 '지금 이 순간'의 속도를 보여 준다. 순간에는 시간이 흐르지 않는데, 무엇을 재는 걸까? 미분에서 회전까지 · 2편 · 적분 거리를 되찾기 속도계 기록만 남았다. 차가 어디까지 갔는지 되찾을 수 있을까? 미분에서 회전까지 · 3편 · 테일러 급수 한 점에서 전부를 한 점에서의 값과 기울기, 휘는 정도만으로 함수 전체를 다시 그릴 수 있을까? 미분에서 회전까지 · 5편 · 복소수와 행렬 곱셈은 회전이다 복소수를 곱하는 일과 행렬로 평면을 돌리는 일은 같은 일이다. 확률 도박판에서 온 편지 1654년, 도중에 멈춘 내기의 판돈을 어떻게 나눌까? 두 수학자가 주고받은 편지에서 확률론이 태어났다. 최소제곱과 선형대수 잃어버린 소행성 1801년, 발견 몇 주 만에 태양 뒤로 사라진 세레스. 스물네 살의 가우스는 흩어진 관측값에서 궤도를 되찾았다. 비유클리드 기하 평행선의 반란 유클리드의 다섯 번째 공준은 2,000년 동안 증명되지 않았다. 증명을 포기한 사람들이 찾은 것은 새로운 우주였다. 혼돈 나비의 날갯짓 방정식이 정해져 있으면 미래도 정해질까? 소수점 아래 몇 자리를 버린 계산이 날씨 예보의 한계를 드러냈다. 신경망과 기계 학습 배우는 기계 예를 보여 주면 규칙을 스스로 찾는 기계. 1958년의 퍼셉트론에서 오늘의 심층 신경망까지, 그 밑바닥에는 미분과 연쇄법칙이 있다. 라플라시안 라플라시안, 가장 많이 재사용된 식 이웃의 평균에서 나를 뺀다. 이 한 줄이 열의 법칙이고, 도박꾼이 이길 확률이고, 전기 회로와 나무 세기이고, 북의 음색이고, 사진의 윤곽선이고, 그래프를 가르는 칼이고, 잡음에서 그림을 빚는 확산 모델의 밑그림이다. 수학의 오류 틀린 증명이 만든 수학 틀린 증명은 흔하다. 드물게, "정확히 어디가 틀렸는가"라는 물음이 새 분야를 낳는다. 코시의 합 정리와 균등 수렴, 라메의 증명과 아이디얼, 켐프의 사슬, 푸앵카레의 회수된 논문과 혼돈, 프레게의 법칙과 러셀의 편지, 보예보츠키와 증명 보조기까지. 오류는 대개 서로 다른 두 가지를 하나로 여긴 자리에 있었다. 압축과 과학 압축하는 것이 이해하는 것이다 튀코 브라헤가 20년 동안 적은 행성의 위치를 케플러는 법칙 세 줄로 줄였다. 짧게 적는 일과 이해하는 일은 정말 같은 일일까? 오컴의 면도날을 비트로 재는 법, 과적합을 압축의 실패로 읽는 법, 그리고 그 말이 정리인 곳과 철학인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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