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플라톤의 제자이자 알렉산드로스의 스승으로, 논증의 형식을 처음 체계로 세우고 무한을 '끝없이 계속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만 인정해 2,000년 동안 수학자들이 무한을 대하는 태도를 정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원전 384년 그리스 북부 칼키디케반도의 스타게이라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니코마코스는 마케도니아 왕실의 의사였습니다. 열일곱 살에 아테네로 가서 플라톤의 학원 아카데메이아에서 20년 가까이 공부하고 가르쳤습니다. 그 무렵 아테네는 소크라테스가 죽은 뒤 철학의 중심이었고, 아카데메이아에서는 에우독소스가 비례론(theory of proportion)과 실진법(원 안팎에 다각형을 채워 넓이(area)를 조여 가는 방법)을 세우고, 아테네의 수학자 테아이테토스가 무리량(irrational magnitude)을 분류하는 등 수학이 증명의 학문으로 자리 잡아 가고 있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스로 수학자는 아니었지만, 증명이란 무엇이고 무한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그의 답은 그 뒤 2,000년 동안 수학자들이 일하는 틀이 되었습니다. 『형이상학』 1권에서 그는 '이른바 피타고라스 학파'가 수를 만물의 원리로 삼았다고 소개하고 비판했는데, 이것이 그 학파에 대해 남은 증언 가운데 가장 믿을 만한 것으로 꼽힙니다.
나이
관찰하는 철학자. 플라톤이 죽은 뒤 그는 소아시아의 아소스와 레스보스섬에서 몇 해를 보냈습니다. 레스보스의 석호에서 그는 뒷날 뤼케이온을 이을 테오프라스토스와 함께 물고기와 연체동물을 해부하고 관찰했고, 그 기록이 『동물지』 같은 생물학 저작이 되었습니다. 기원전 343년 무렵부터는 마케도니아의 왕자 알렉산드로스를 몇 해 가르쳤습니다. 기원전 335년 아테네로 돌아와 연 학원 뤼케이온에서는 제자들과 함께 158개 도시의 정치 체제를 모으는 등 자료를 모아 분류하는 공동 연구를 했습니다. 1882년 찰스 다윈은 자기가 신처럼 우러러본 분류학의 린네와 비교해부학의 퀴비에도 '늙은 아리스토텔레스'에 비하면 학생에 지나지 않는다고 편지에 썼습니다. 지리학자 스트라본은 그가 처음으로 책을 모았고 이집트의 왕들에게 도서관을 꾸리는 법을 가르쳤다고 적었는데, 실제로 그의 학파에서 나온 팔레론의 데메트리오스가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조언자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설립에 관여했다고 전합니다(알렉산드리아 무세이온).
논증의 형식. 『분석론 전서』에서 그는 '모든 B가 A이고 모든 C가 B이면, 모든 C는 A이다' 같은 추론의 꼴, 곧 삼단논법(syllogism)을 체계적으로 분류했습니다. 핵심은 낱말 대신 글자를 쓴 데 있습니다. A, B, C에 무엇을 넣어도 앞의 두 문장이 참이면 뒤의 문장이 참이니, 추론이 옳은지는 내용이 아니라 형식이 정합니다. 그는 같은 것이 같은 점에서 동시에 그렇고 그렇지 않을 수는 없다는 모순율(law of contradiction), 어떤 주장은 참이거나 거짓이거나 둘 중 하나라는 배중률(law of excluded middle)도 논리의 기본 원리로 다뤘습니다. 2,000년 뒤 조지 불은 이 추론들을 대수의 계산으로 옮겼고(불 대수, Boolean algebra), 라이프니츠가 꿈꾼 '생각의 계산'은 섀넌의 논리 회로와 튜링 기계(Turing machine)로 이어졌습니다.
공리(axiom)에서 출발하는 학문. 『분석론 후서』에서 그는 증명된 지식이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모든 것을 증명할 수는 없으니, 증명은 더 증명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첫 원리, 곧 정의와 공리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세대 뒤 유클리드의 『원론』이 바로 그렇게 쓰였습니다. 첫 원리는 그 자체로 분명해야 한다는 이 요구 때문에, 유난히 길고 어색한 평행선 공준(parallel postulate)은 2,000년 동안 증명해야 할 문장으로 여겨졌습니다. 그가 논리를 설명하며 드는 예에도 당시의 수학이 보입니다. 『분석론 전서』에서 그는 귀류법(proof by contradiction)의 본보기로 정사각형의 대각선이 변과 공통 단위로 잴 수 없다는 증명을 들었습니다. 잴 수 있다고 하면 같은 수가 홀수이면서 짝수가 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무리수(irrational number)의 발견이 그 무렵 이미 학교에서 가르치는 표준 증명이 되어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가능적 무한(potential infinity). 『자연학』 3권에서 그는 무한이 가능적으로만 있다고 보았습니다. 선분은 얼마든지 더 나눌 수 있고 수는 얼마든지 더 셀 수 있지만, 그 과정이 끝나 무한히 많은 것이 한꺼번에 주어지는 일, 곧 실무한(actual infinity)은 없다는 것입니다. 수학자에게도 실무한은 필요 없고, 원하는 만큼 긴 유한한 선분이면 충분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엘레아의 제논이 낸 역설에 대한 답이기도 했습니다. 아킬레우스가 거북을 따라잡으려면 거북이 있던 곳에 무한히 여러 번 먼저 가야 한다는 논증에, 그는 선분 속의 무한한 분할점은 가능성으로만 있을 뿐이라고 답했습니다. 오늘날의 답은 그 무한히 많은 구간의 길이가 등비급수(geometric series)를 이루어 유한한 값으로 수렴(convergence)한다는 것이고, 그 수렴을 정의하는 말이 극한(limit)입니다. 아킬레우스가 거북보다 10배 빠르고 100 m 뒤에서 출발한다면, 거북이 있던 곳까지 차례로 달리는 거리는 100 + 10 + 1 + 0.1 + ⋯ m이고, 그 합은 1000/9 ≈ 111.1 m로 유한합니다. 아킬레우스는 바로 그 지점에서 거북을 따라잡습니다. 그는 선이 점들을 이어 붙인 것이 아니고 시간도 나눌 수 없는 '지금'들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보았는데, 이 물음은 뒷날 연속성(continuity)과 실수(real number)의 정의로 돌아옵니다.
이 구분은 그리스 수학의 모양을 정했습니다(무한을 다루는 법). 유클리드는 소수(prime number)가 무한히 많다고 하지 않고 '주어진 어떤 개수보다도 많다'고 썼고, 아르키메데스는 포물선(parabola)의 넓이를 구하면서 무한히 더하는 대신 '크다고 해도 작다고 해도 모순'이라는 이중 귀류법(double reductio ad absurdum)을 썼습니다. 1638년 갈릴레이는 1↔1, 2↔4, 3↔9, 4↔16처럼 자연수(natural number)와 제곱수(perfect square)를 하나도 남김없이 짝지을 수 있다는 역설 앞에서, 제곱수는 자연수의 일부일 뿐인데도 개수가 같아 보인다는 이유로 무한에는 크기를 비교하는 말을 쓸 수 없다고 물러섰습니다. 무한을 하나의 대상으로 다루는 일은 19세기 칸토어가 짝짓기로 집합의 크기(cardinality)를 정의하면서야 받아들여졌고, 그때도 격렬한 반대가 있었습니다.
그의 자연학은 수학과 조금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그는 물체가 저마다 본래의 자리로 가려 하고, 무거운 물체가 가벼운 물체보다 빨리 떨어진다고 보았습니다. 17세기에 갈릴레이가 이것을 반박하며 근대 역학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자연학은 2,000년 동안 관찰과 상식에 잘 들어맞는 체계였습니다. 공기 속에서 깃털은 정말로 돌보다 늦게 떨어지고, 밀어 주지 않는 수레는 정말로 멈춥니다. 마찰과 공기 저항을 걷어 낸 이상화된 세계를 상상하는 것이 근대 과학이 한 새로운 일이었습니다.
바그다드와 파리. 오늘 우리가 읽는 그의 저작은 대부분 강의 노트로, 기원전 1세기 로도스의 안드로니코스가 편집한 모음에서 왔습니다. 6세기에 로마의 철학자 보에티우스가 논리학 책 일부를 라틴어로 옮겼고, 같은 무렵 알렉산드리아의 그리스도교 철학자 필로포노스는 세계가 영원하다는 그의 주장과 운동 이론을 반박했습니다. 9세기 바그다드의 지혜의 집 둘레에서 그의 저작 대부분이 아랍어로 옮겨졌고, 알킨디에서 시작해 알파라비(10세기 바그다드의 철학자), 이븐 시나(11세기 페르시아의 의사이자 철학자, 라틴 이름 아비센나), 이븐 루시드(12세기 코르도바의 철학자, 라틴 이름 아베로에스)로 이어지는 철학자들이 그를 해설했습니다. 알파라비는 '제2의 스승'이라 불렸는데, 첫째 스승은 아리스토텔레스였습니다. 이븐 루시드는 라틴 세계에서 그냥 '그 주석가'로 통했습니다. 12–13세기에 그리스어와 아랍어에서 라틴어 번역이 쏟아졌고, 1255년 파리 대학 인문학부는 그의 저작을 필수 교재로 정했습니다. 스콜라 학자들은 그를 그냥 '그 철학자'라고 불렀고, 13세기의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의 철학을 그리스도교 신학과 엮었습니다. 반발도 있었습니다. 1277년 파리 주교 탕피에는 신도 하늘을 곧은 선으로 움직일 수 없다(그러면 빈 곳이 생기니까)는 명제를 포함해 그의 철학에서 나온 219개 명제를 단죄했고, 이 일이 오히려 진공과 다른 세계를 상상할 여지를 열었다고 보는 역사가도 있습니다.
2,000년 뒤의 평가. 1787년 칸트는 논리학이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한 걸음도 나아가거나 물러서지 않았다고 썼습니다. 그만큼 삼단논법은 완결된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19세기에 불이 논리를 대수로 옮기고, 1879년 프레게가 '모든 x에 대해'와 '어떤 x가 있어서'(양화사, quantifier)를 변수와 함께 기호로 쓰는 논리를 내놓으면서, 삼단논법은 훨씬 넓은 논리의 작은 조각이 되었습니다. '모든 수에 대해 그보다 큰 수가 있다'와 '모든 수보다 큰 수가 있다'처럼 '모든'과 '어떤'이 겹친 문장은 삼단논법으로 다룰 수 없었는데, 바로 그런 문장이 극한의 정의에 필요했습니다. 무한에 대해서는 1883년 칸토어가 실무한을 거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증을 직접 반박하며 집합론(set theory)을 세웠습니다. 그를 넘어선 사람들이 모두 그를 상대로 삼았다는 점에서, 그는 끝까지 논쟁의 기준점이었습니다. 개인사로는,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뒤 아테네에 반마케도니아 분위기가 일자 어머니의 고향 칼키스로 떠나 이듬해 그곳에서 죽었습니다.
이어지는 곳. 추론을 내용이 아닌 형식으로 따지는 그의 생각은, 참과 거짓을 0과 1로 놓고 계산하는 불 대수로 이어졌고, 형식 체계(formal system)로 증명할 수 있는 것의 한계를 보인 불완전성 정리(incompleteness theorem)에 이르렀습니다. 그가 인정하지 않은 실무한은, 무한 집합끼리 짝을 지어 크기를 비교하는 가산 집합(countable set)과 실수가 자연수보다 많음을 보인 대각선 논법(diagonal argument)에서 정면으로 다뤄집니다. 제논의 역설에 대한 오늘날의 답은, 무한히 많은 항의 합이 유한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등비급수와 그 합을 정의하는 극한에 있습니다. 인도의 문법학자 파니니가 그와 같은 시대를 살았을지도 모르지만, 파니니의 연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관계.
- 영향을 줌 알킨디 — 알킨디는 자기 주변에서 아랍어로 옮겨진 『형이상학』을 해설하면서도, 세계가 영원하다는 주장에는 실무한이 없다는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의 원칙으로 맞섰습니다.
- 영향을 줌 조지 불 — 불은 1847년 『논리의 수학적 분석』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을 대수 방정식으로 옮겨 계산했습니다.
- 논쟁 게오르크 칸토어 — 칸토어는 1883년 『일반 집합론의 기초(basics)』에서 실무한은 있을 수 없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증을 직접 반박했습니다.
연표.
- 기원전 367년 아테네로 가 플라톤의 아카데메이아에 들어가다
- 기원전 347년 플라톤이 죽은 뒤 아테네를 떠나 소아시아의 아소스로 가다
- 기원전 343년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2세의 부름으로 왕자 알렉산드로스를 가르치다
- 기원전 335년 아테네로 돌아와 뤼케이온에 학원을 열다
-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뒤 아테네를 떠나 칼키스로 가다
- 기원전 322년 칼키스에서 죽다
이 인물이 나오는 긴 글
이 인물을 언급하는 페이지
- 무리수
… 바다에 빠져 죽었다는 이야기는 판본마다 어긋나는 후대의 전설입니다. 위의 홀짝 증명은 기원전 4세기아리스토텔레스가 이미 귀류법의 예로 들었습니다. 정수의 비만 다루던 그때까지의 비례 이론은 이런 길이에 쓸 수 …
- 공리와 공준
… 이 거슬러 오르기가 끝없이 이어질 수는 없으니, 어딘가에서 증명 없이 받아들이는 출발점이 필요합니다.아리스토텔레스가 이미 이렇게 말했고, 그 출발점을 공리라 합니다. 공리를 정하고 나면 나머지는 모두 거기서 논리만으로 …
- 범주론
… 자연 변환을, 그러려면 함자를, 그러려면 범주를 정의해야 했습니다. 매클레인의 회고에 따르면 '범주'는아리스토텔레스와 칸트에게서, '함자'는 철학자 루돌프 카르나프에게서 빌린 말입니다. 알렉산더 그로텐디크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