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르 롱 달랑베르(Jean le Rond d'Alembert)
프랑스의 수학자·물리학자·계몽사상가. 떨리는 줄의 파동방정식(wave equation)을 처음 세우고 풀었으며, 동역학을 정역학으로 바꾸는 원리를 내놓고, 디드로와 함께 『백과전서』를 엮었다.
장 르 롱 달랑베르는 1717년 11월 파리에서 태어나 며칠 만에 노트르담 대성당 곁의 작은 교회 생장르롱의 계단에 버려졌습니다. 이름은 그 교회에서 왔습니다. 어머니는 뒷날 이름난 살롱의 여주인이 되는 탕생 부인이었고, 아버지는 포병 장교 데투슈였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찾아 유리 장인의 아내 루소 부인에게 맡기고 교육비를 댔으며, 달랑베르는 이 양어머니의 집에서 쉰 가까이 될 때까지 살았습니다. 그가 자란 18세기 중엽의 파리는 과학 아카데미와 살롱과 카페가 뉴턴의 새 물리학을 소화하던 곳이었고, 수학자들은 이제 막 라이프니츠의 미적분(calculus) 기호로 행성과 줄과 유체의 운동을 방정식으로 적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나이
그는 얀센파가 운영하던 콜레주 데 카트르나시옹에서 공부하고 법학과 의학을 잠시 거쳤지만, 수학은 거의 혼자 익혔습니다. 스물셋이던 1741년 과학 아카데미에 들어갔고, 1743년의 『동역학 논고』로 이름을 얻었습니다. 이 책의 '달랑베르의 원리(d'Alembert's principle)'는 움직이는 물체의 문제를 멈춰 있는 물체의 문제로 바꾸는 방법입니다. 뉴턴의 법칙 F = ma를 F − ma = 0으로 옮겨 적고, −ma를 물체에 걸린 또 하나의 힘, 곧 관성력(inertial force)으로 보면 모든 힘의 합이 0인 평형의 문제가 됩니다. 도르래에 매달린 추나 서로 묶인 막대처럼 부분들이 얽혀 움직이는 기계도, 부분마다 이 가상의 힘을 더하면 정역학의 규칙으로 풀 수 있습니다. 이 원리는 라그랑주의 『해석 역학』(1788)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1747년, 그는 베를린 아카데미의 논문집에 떨리는 줄의 방정식을 실었습니다(파동방정식). 진폭(amplitude)이 작을 때 줄의 한 작은 토막이 받는 힘은 그 자리에서 줄이 얼마나 휘었는지에 비례하고, 그 힘이 토막을 가속시킵니다. 그래서 줄의 높이 y를 위치 x와 시간 t의 함수(function)로 보면, 시간으로 두 번 미분(differentiation)한 값이 위치로 두 번 미분한 값의
이 해가 곧 논쟁을 불렀습니다. 처음 모양 f와 g에는 어떤 함수가 올 수 있는가? 달랑베르는 방정식을 미분해야 하니 줄의 모양은 하나의 식으로 쓸 수 있는 매끄러운 곡선이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베를린의 오일러는 손가락으로 튕긴 줄의 뾰족한 삼각형 모양도 분명히 물리적으로 가능한 처음 모양이라고 맞섰습니다. 바젤의 다니엘 베르누이는 줄의 모든 진동이 기본음(fundamental tone)과 배음(overtone), 곧 사인(sine) 모양 진동들의 합이라고 주장했고, 토리노의 젊은 라그랑주도 뛰어들었습니다. 이 네 사람이 편지와 아카데미 논문집으로 수십 년을 다툰 질문, 곧 '임의의 곡선'을 식으로 쓸 수 있는가, 뾰족한 곡선을 매끄러운 사인들의 합으로 쓸 수 있는가는 푸리에의 푸리에 급수(Fourier series)와 디리클레의 함수 정의로 이어졌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함수라 부르는 것의 뜻 자체가 이 논쟁에서 다듬어졌습니다(편지 공화국).
1740년대 후반의 그는 물리학의 거의 모든 분야에 손을 댔습니다. 1746년 바람의 원인을 다룬 논문으로 베를린 아카데미의 상을 받았고, 같은 해 모든 다항식(polynomial)이 복소수(complex number) 근을 가진다는 대수학의 기본정리(fundamental theorem of algebra)를 증명하려 했습니다. 이 증명에는 빈틈이 있었고 1799년 가우스가 학위 논문에서 그 빈틈을 지적했지만, 프랑스에서는 지금도 이 정리를 '달랑베르의 정리'라 부릅니다. 1749년에는 지구의 자전축이 팽이처럼 천천히 원을 그리는 세차 운동(precession)을 뉴턴의 중력으로 설명했습니다. 1752년 유체 역학 연구에서는 점성이 없는 이상 유체 속을 일정하게 움직이는 물체에는 저항이 전혀 생기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르러, 스스로도 이것을 역설이라 불렀습니다. 이 '달랑베르의 역설(d'Alembert's paradox)'은 150년 뒤 물체 표면의 얇은 경계층이 점성의 효과를 지닌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풀렸습니다.
1751년부터 그는 철학자 디드로와 함께 『백과전서』를 엮었습니다. 모든 기술과 학문을 알파벳 순서의 항목으로 모아 이성의 빛으로 설명하겠다는 이 사업은 계몽주의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첫 권의 「서론」에서 달랑베르는 인간 지식이 감각에서 출발해 기억, 이성, 상상으로 갈라지는 나무를 그렸고, 수학과 과학 항목의 상당수를 직접 썼습니다. 1757년 그가 쓴 「제네바」 항목이 칼뱅파 목사들의 반발과 비평가들의 공격을 부르자 그는 이듬해 편집에서 물러났고, 1759년에는 사전의 출판 허가 자체가 취소되었습니다. 디드로는 그 뒤로도 남은 권들을 몰래 이어 펴냈습니다. 1754년 아카데미 프랑세즈에 들어갔고 1772년 그 종신 서기가 되어, 파리 문단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백과전서』의 항목들에는 버클리가 던진 질문에 대한 그의 답도 있습니다. 「미분」(1754)과 「극한」(1765) 항목에서 그는 미적분의 참된 형이상학은 무한히 작은 양이 아니라 극한(limit)에 있다고 썼습니다. 어떤 양이 다른 양에 원하는 만큼 가까이 다가가되 결코 넘어서거나 같아지지 않을 때 그 다가가는 값이 극한이며, 미분계수(derivative)는 두 증분의 비가 다가가는 극한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직 정확한 정의가 아니라 방향을 가리키는 말이었지만, 반세기 뒤 코시가 걸어간 길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조지 버클리).
무한한 합을 다루는 도구도 하나 남겼습니다. 1768년 『소논문집』에서 그는 급수(series)가 수렴(convergence)하는지 판정하는 방법을 적었는데, 오늘날 달랑베르 판정법이라 부르는 비율 판정법입니다. 급수
그가 틀린 곳도 유명합니다. 1754년 『백과전서』의 「앞면 또는 뒷면」 항목에서 그는 동전을 두 번 던져 앞면이 한 번이라도 나올 확률(probability)이 3/4이 아니라 2/3라고 주장했습니다. 첫 번에 앞면이 나오면 두 번째는 던질 필요가 없으니 경우는 '앞', '뒤앞', '뒤뒤' 셋뿐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 경우가 똑같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 곧 '앞'은 확률 1/2이고 나머지는 1/4씩이라는 점을 놓친 것입니다. 그는 또 다니엘 베르누이가 천연두 예방 접종의 이득을 기대 수명으로 계산한 것을 두고, 당장 죽을 위험과 먼 훗날의 이득을 한 숫자로 더하는 것이 옳으냐고 따졌습니다. 이 물음은 틀린 계산과 달리 오늘날 의사 결정 이론(decision theory)에서도 진지하게 다루어집니다(확률, 기댓값(expected value)).
그는 유럽의 군주들에게서도 존경을 받았습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는 그에게 베를린 아카데미의 원장 자리를 맡기려 했고,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는 황태자의 가정교사로 초대했지만 그는 둘 다 사양하고 파리에 남았습니다. 대신 젊은 수학자들을 밀어주었습니다. 1766년 오일러가 베를린을 떠나자 오일러와 함께 라그랑주를 후임으로 추천했고, 1769년에는 추천장을 들고 찾아온 무명의 라플라스에게 사관학교의 자리를 구해 주었습니다. 오랜 벗 레스피나스가 1776년 죽은 뒤 그는 쓸쓸한 말년을 보냈고, 1783년 오일러와 같은 해에 파리에서 죽었습니다.
이어지는 곳. 두 진행파로 쓰는 해는 파동방정식에서, 그 해를 사인들로 다시 쓰는 방법은 푸리에 급수와 사인파(sinusoid)에서 볼 수 있습니다. 비율 판정법(ratio test)은 등비급수와 수렴 반지름에, 작은 진동만 남기고 나머지를 버리는 그의 방법은 선형화(linearization)에 이어집니다. 같은 논쟁의 사람들은 오일러, 라그랑주, 푸리에의 페이지에 있습니다.
관계.
- 논쟁 레온하르트 오일러 — 떨리는 줄의 처음 모양으로 뾰족한 꺾임을 허용할 것인가를 두고 오랫동안 다투었고, 이 논쟁이 '함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낳았습니다.
- 편지 조제프루이 라그랑주 — 토리노의 젊은 라그랑주를 일찍 알아보고 평생 편지를 나누었으며, 1766년 오일러와 함께 그를 베를린 아카데미의 후임으로 추천했습니다.
- 영향을 줌 피에르시몽 라플라스 — 추천장을 들고 찾아온 스무 살 무렵의 라플라스에게 1769년 파리 사관학교의 교사 자리를 구해 주고 그 뒤로도 뒤를 봐주었습니다.
- 영향을 받음 아이작 뉴턴 — 뉴턴의 '마지막 비'를 극한으로 읽어 미분을 극한 위에 세워야 한다고 보았고, 세차 운동을 뉴턴의 중력으로 설명했습니다.
연표.
- 1741년 과학 아카데미에 들어가다
- 1743년 『동역학 논고』에서 '달랑베르의 원리'를 내놓다
- 1746년 바람에 관한 논문으로 베를린 아카데미의 상을 받고, 대수학의 기본정리를 증명하려 하다
- 1747년 떨리는 줄의 방정식을 세우고 풀다
- 1749년 세차 운동을 뉴턴 역학으로 설명하다
- 1751년 『백과전서』 첫 권에 「서론」을 쓰다
- 1754년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이 되다
- 1758년 「제네바」 항목이 부른 소동 끝에 『백과전서』의 공동 편집에서 물러나다
- 1768년 『소논문집』에 급수의 수렴을 판정하는 비율 판정법을 싣다
- 1772년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종신 서기가 되다
이 인물이 나오는 긴 글
이 인물을 언급하는 페이지
- 푸리에 급수
… 나왔습니다. 사인파를 더해 줄의 떨림을 나타내자는 생각은 1753년 스위스의 다니엘 베르누이가 내놓았고,달랑베르와 오일러는 그런 합으로 모든 모양을 나타낼 수는 없다며 반대했습니다. 떨리는 줄이 따르는 식이 …
- 파동방정식
… 모양이 반씩 나뉘어 양쪽으로 달려가고, 고정된 끝에서는 위아래가 뒤집혀 반사됩니다. 1747년 프랑스의달랑베르가 이 해를 구했습니다. 베르누이: 정상파. 스위스의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인 다니엘 베르누이(⟦야코프 …
- 별과 막대
… 확률을 셀 때는 주사위를 구별해서 세야 한다는 점은 초기 확률론에서 자주 헷갈린 대목입니다. 1754년달랑베르가 동전을 두 번 던져 앞면이 한 번이라도 나올 확률을, 경우를 '첫 번째 앞면', '뒤-앞', …
- 급수의 수렴과 발산
… 작은 수로 다가가면 결국 등비급수보다 작아져 수렴하고, 1보다 큰 수로 다가가면 항이 커져서 발산합니다(달랑베르의 비율 판정법). 비가 정확히 1로 다가가면 이 판정법은 답을 주지 않습니다. 발산하는 조화급수와 …
- 다항식
… 곱으로 쪼개집니다. 이것이 대수학의 기본정리입니다. 1629년 프랑스의 알베르 지라르가 처음 주장했고달랑베르(1746)와 오일러 등이 증명을 시도했으며, 가우스가 1799년 박사 논문에서 증명을 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