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키메데스(Archimedes)
시칠리아 시라쿠사의 수학자이자 기술자로, 포물선(parabola) 조각의 넓이(area)와 구의 부피, 원주율(pi)의 범위를 도형을 잘게 나누는 논법으로 구해 적분(integral)의 먼 조상이 된 사람.
아르키메데스는 기원전 3세기 시칠리아의 그리스 도시 시라쿠사에서 살았습니다. 그가 일흔다섯 살에 죽었다는 12세기의 기록에서 거꾸로 셈해 기원전 287년 무렵에 태어났다고 보지만, 이 연도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확실한 것은 기원전 212년 로마군이 시라쿠사를 함락할 때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모래알을 세는 사람』에서 자기 아버지를 천문학자 페이디아스라고 적었고, 시라쿠사를 다스리던 왕 히에론 2세와 가까운 사이였다고 전합니다. 시라쿠사는 지중해의 패권을 두고 싸우던 로마와 카르타고 사이에 끼어 있었습니다. 학문의 중심은 알렉산드리아였기 때문에 그의 결과는 대부분 그곳의 천문학자 코논, 수학자 도시테오스, 도서관장 에라토스테네스에게 보낸 글의 형태로 남았습니다.
나이
왕의 기술자. 시라쿠사는 서지중해에서 가장 큰 그리스 도시였고, 히에론 2세는 기원전 270년 무렵부터 반세기 넘게 이곳을 다스렸습니다. 1차 포에니 전쟁 초기인 기원전 263년 로마와 동맹을 맺은 뒤 시라쿠사는 오랫동안 평화와 번영을 누렸습니다. 아르키메데스의 이름은 이 왕국의 기술과 얽혀 전합니다. 2–3세기의 저술가 아테나이오스가 옮긴 옛 기록에 따르면 히에론이 곡물을 실어 나를 거대한 배 '시라쿠시아'를 지었을 때 아르키메데스가 도르래 장치로 그 배를 바다에 띄웠다고 하고, 역사가 디오도로스는 원통 속 나선을 돌려 물을 퍼 올리는 양수기를 그가 이집트에 머물 때 고안했다고 적었습니다. 둘 다 확인할 수 없는 전승입니다. 로마의 정치가이자 연설가 키케로는, 시라쿠사를 함락한 로마 장군 마르켈루스가 시라쿠사에서 가져온 전리품 가운데 해와 달과 행성의 움직임을 보여 주는 아르키메데스의 천구 모형이 있었다고 기록했습니다. 순수한 증명의 대가가 동시에 왕실의 기술자였던 셈인데, 전기 작가 플루타르코스는 그가 기계 만드는 일을 기하학의 곁가지로 여겨 그에 관한 글을 남기려 하지 않았다고 썼습니다.
편지로 하는 연구. 알렉산드리아에서 멀리 떨어진 그에게 알렉산드리아 무세이온의 학자들은 편지 상대였고, 그의 책들은 대부분 서문이 편지로 되어 있습니다. 친구였던 천문학자 사모스의 코논이 죽자 그는 『포물선의 구적』 서문에서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코논과 가까웠던 도시테오스에게 결과를 보냈습니다. 『나선에 관하여』의 서문에서는 몇 해 전 코논에게 증명 없이 정리들만 보냈는데, 남의 결과를 제 것이라 주장하면서 증명은 내놓지 못하는 사람들을 가려내려고 일부러 틀린 정리 두 개를 섞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결과를 먼저 알리고 증명은 나중에 보내는 이 방식은 1,800년 뒤 페르마가 편지로 문제를 내던 방식과 닮았습니다.
포물선의 넓이. 포물선을 직선 하나로 잘라 낸 부분, 곧 포물선 조각의 넓이를 구하는 문제입니다. 그 안에 들어가는 가장 큰 삼각형 하나를 그리고, 남은 두 틈에 다시 삼각형을 그리고, 이를 되풀이합니다. 새로 그리는 삼각형들의 넓이의 합은 매번 앞 단계의 4분의 1입니다. 그래서 전체 넓이는 첫 삼각형의
원주율과 구. 『원의 측정』에서 그는 유클리드가 『원론』 12권에 남긴 실진법을 훨씬 멀리 밀고 나가, 원 안팎에 정육각형을 그리고 변의 수를 두 배씩 늘려 12, 24, 48, 96각형까지 갔습니다. 안쪽 다각형의 둘레는 원둘레보다 짧고 바깥쪽 다각형의 둘레는 길니, 원주율이 둘 사이에 끼입니다. 그 결과가
저울로 발견하기. 『평면의 평형에 관하여』에서 그는 두 무게가 받침점에서 무게에 반비례하는 거리에 있으면 평형을 이룬다는 지레의 법칙(law of the lever)을 공리(axiom)에서 증명했습니다. 이 저울이 그의 발견 도구였다는 사실은 오래 묻혀 있다가 20세기에 드러났습니다. 『방법』에서 그는 에라토스테네스에게 도형을 얇은 띠로 잘라 상상의 저울에 달아 보는 방식으로 답을 먼저 얻고, 증명은 따로 엄밀하게 했다고 털어놓습니다. 이런 식으로 찾은 것은 증명이 아니지만, 답을 미리 알면 증명을 찾기가 훨씬 쉽다는 것입니다. 도형을 가는 조각으로 나누어 더하는 이 생각이 리만 합(Riemann sum)과 적분의 먼 조상입니다.
큰 수. 『모래알을 세는 사람』에서 그는 우주를 가득 채울 모래알의 수도 이름 붙일 수 있음을 보였습니다. 그리스의 수 이름은 만(미리아스)까지였으므로, 그는 만의 만 배인 1억(
시라쿠사의 마지막 날들. 기원전 215년 히에론이 죽자 손자 히에로니모스가 뒤를 이었고, 시라쿠사는 한니발이 이탈리아에서 로마를 몰아붙이던 2차 포에니 전쟁의 한가운데서 카르타고 편으로 돌아섰습니다. 기원전 214년 마르켈루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바다와 뭍에서 도시를 에워쌌습니다. 그리스의 역사가 폴리비오스와 로마의 역사가 리비우스, 그리고 플루타르코스는 성벽 뒤에서 날아오는 돌과 배를 갈고리로 들어 올려 뒤집는 기계들 때문에 로마군이 정면 공격을 포기하고 봉쇄로 돌아섰다고 전합니다. 거울로 햇빛을 모아 배를 불태웠다는 이야기는 수백 년 뒤의 저술가들에게서 처음 나타나 의심스럽습니다. 기원전 212년 도시는 축제로 경계가 느슨해진 틈에 함락되었고, 아르키메데스는 그 와중에 로마 병사의 손에 죽었습니다. 리비우스는 마르켈루스가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장례를 치르게 하고 그의 친척들을 보호했다고 적었습니다. 모래 위의 도형을 들여다보다 병사에게 도형을 흐트러뜨리지 말라고 했다가 죽었다는 장면은 후대에 굳은 이야기로, 플루타르코스도 여러 판본 가운데 하나로만 전합니다.
그 밖의 일화들도 전설에 가깝습니다. 목욕탕에서 넘치는 물을 보고 왕관의 금에 은이 섞였는지 가리는 법을 떠올려 "유레카"를 외치며 뛰어나갔다는 이야기는 200년쯤 뒤 로마의 건축가 비트루비우스가 전하는 것으로,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설 자리만 주면 지구를 움직이겠다고 했다는 말도 4세기의 수학자 파포스 등 후대의 기록을 통해 전합니다.
사본의 여행. 그의 글은 어려워서 고대에도 널리 베껴지지 않았습니다. 6세기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하기아 소피아를 설계한 밀레토스의 이시도로스가 그의 책들을 모아 편집했고, 수학자 에우토키오스가 주석을 달았습니다. 9세기 바그다드에서는 번역가이자 수학자인 타비트 이븐 쿠라 등이 그의 책을 아랍어로 옮겼고, 그리스어 원문이 사라진 몇몇 글은 아랍어로만 남았습니다. 1269년 플랑드르의 도미니코회 수사 모어베케의 기욤이 그리스어 사본에서 라틴어로 옮겼고, 1544년 바젤에서 그리스어 원문과 라틴어 번역이 처음 인쇄되었습니다. 16–17세기의 수학자들은 이 책을 교본 삼아 넓이와 부피를 새로 구했습니다. 1615년 케플러는 포도주 통의 부피를 재는 책에서 그의 방법을 무한히 작은 조각들을 더하는 계산으로 대담하게 바꾸었습니다. 갈릴레이의 제자 카발리에리는 넓이를 무수히 많은 선분의, 부피를 무수히 많은 얇은 단면의 모임으로 보는 '불가분량(indivisibles)의 방법'을 세웠습니다. 두 입체를 같은 높이에서 자른 단면의 넓이가 어디서나 같으면 두 부피도 같다는 '카발리에리의 원리'가 그 대표입니다.
기도서 밑의 글. 『방법』은 그 모든 경로에서 빠져 있었습니다. 10세기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베낀 양피지 사본 하나에만 남아 있었는데, 1229년 한 필경사가 그 글을 긁어내고 위에 기도문을 적었습니다. 1906년 덴마크의 문헌학자 하이베르가 그 밑의 희미한 글을 읽어 냈지만, 사본은 20세기의 혼란 속에 행방이 묘연해졌다가 1998년 경매에 나왔습니다. 그 뒤 미국 볼티모어의 월터스 미술관에서 10년 가까이 여러 파장의 빛과 X선으로 촬영한 끝에 하이베르가 읽지 못한 부분까지 드러났습니다. 죽은 지 2,000년이 넘어서도 그의 책이 새로 읽히고 있는 셈입니다. 라이프니츠는 아르키메데스와 원뿔곡선(conic section)의 대가 아폴로니오스를 이해하는 사람은 후대의 가장 뛰어난 이들이 이룬 일에 덜 놀랄 것이라고 썼고, 오늘날 수학의 가장 이름난 상인 필즈 메달의 앞면에는 그의 얼굴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어지는 곳. 잘게 나누어 더하는 그의 방법은 17세기 뉴턴과 라이프니츠의 미적분(calculus)에서 미적분의 기본정리(fundamental theorem of calculus)로 완성되었습니다. 원주율을 다각형 대신 끝없는 합(급수, series)으로 구하는 길은 14세기 인도의 마다바가 열었습니다. 포물선 넓이의 4/3은 등비급수의 합으로 다시 볼 수 있고, 도형을 얇은 띠로 잘라 더하는 생각은 리만 합과 적분에서, 이중 귀류법이 무한을 입에 올리지 않고 해낸 일은 극한에서 정식으로 정의됩니다.
관계.
- 영향을 받음 유클리드 — 원 안팎에 다각형을 채워 가는 그의 논법은 『원론』 12권의 실진법을 이어받아 훨씬 멀리 밀고 간 것입니다.
- 편지 에라토스테네스 — 도형을 저울에 달아 답을 먼저 찾는 비밀스러운 방법을 담은 『방법』을 에라토스테네스에게 써 보냈습니다.
- 영향을 줌 갈릴레오 갈릴레이 — 젊은 갈릴레이는 1586년 그를 본받아 물속 무게로 합금을 가리는 『작은 저울』을 썼습니다.
연표.
- 기원전 264년 로마와 카르타고의 1차 포에니 전쟁이 시작되다
- 기원전 263년 히에론 2세가 로마와 동맹을 맺다
- 기원전 250년 포물선 조각의 넓이를 알렉산드리아의 도시테오스에게 써 보내다(무렵)
- 기원전 215년 히에론 2세가 죽고 시라쿠사가 카르타고 편으로 돌아서다
- 기원전 214년 로마군의 포위 속에서 그의 기계들이 시라쿠사를 지키다
- 기원전 212년 로마군이 시라쿠사를 함락하고, 그 와중에 죽다
이 인물이 나오는 긴 글
이 인물을 언급하는 페이지
- 수 체계: 자연수에서 실수까지
… 수렴한다고 말해도 같습니다. 다만 이 둘째 표현은 '어떤 수든 1을 충분히 여러 번 더하면 넘어선다'는아르키메데스성질과 함께 써야 첫째 표현과 같아집니다. 극한이 있다는 보장, 중간값 정리, 넓이를 정하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