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랄라 학파(Kerala school of astronomy and mathematics)
14세기 말부터 17세기 초까지 인도 남서쪽 말라바르 해안의 브라만 가문들 안에서 이어진 천문학자 계보. 마다바에서 닐라칸타와 제스타데바까지, 사인(sine)·코사인(cosine)·아크탄젠트(arctangent)의 무한급수(infinite series)와 그 오차를 줄이는 보정항을 유럽보다 두 세기 앞서 얻었다.
인도 아대륙의 남서쪽 끝, 서고츠산맥과 아라비아해 사이의 좁은 땅 케랄라에서 14세기 말부터 17세기 초까지 한 줄기의 천문학자들이 스승에서 제자로 이어졌습니다. 상가마그라마의 마다바에서 시작해 닐라칸타와 제스타데바에 이르는 이 사람들을 오늘날 케랄라 학파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사인, 코사인, 아크탄젠트를 x, x³, x⁵, …처럼 끝없이 이어지는 거듭제곱의 합으로 나타내고, 원주율(pi)을 끝없이 더해 가는 합, 곧 무한급수로 계산했습니다(급수(series)의 수렴(convergence)). 유럽에서 뉴턴, 스코틀랜드의 수학자 제임스 그레고리, 라이프니츠가 같은 급수들에 이른 것은 17세기 후반이니, 두 세기 넘게 앞선 일입니다. 이 페이지는 그 일이 왜 하필 그곳에서 일어났고, 왜 오랫동안 바깥에 알려지지 않았는지를 다룹니다.
후추 해안. 케랄라의 말라바르 해안은 세계에서 가장 분주한 바닷길 위에 있었습니다. 후추와 생강, 계피를 사러 아랍과 페르시아의 상인들이 계절풍을 타고 건너왔고, 15세기 초에는 명나라 정화의 함대가 캘리컷(코지코드)에 들렀습니다. 캘리컷의 사무티리(자모린) 같은 해안 왕국들은 이 교역으로 부유했고, 그 부의 일부는 땅과 후원이 되어 사원과 브라만 집안으로 흘러들었습니다. 이들에게 천문학은 실용 학문이었습니다. 제사와 축제의 날짜를 정하는 역법, 일식과 월식의 예보, 길일을 고르는 점성술 모두 해와 달과 행성의 위치를 정확히 계산해야 했습니다. 계산이 하늘과 어긋나면 고쳐야 했고, 천문학자 파라메슈바라는 55년 동안 일식과 월식을 관측해 옛 계산법을 고친 『드리그가니타』(1431)를 지었습니다.
집안에서 집안으로. 학파는 대학이나 궁정이 아니라 남부디리 브라만의 가문(일람)들 안에서 이어졌습니다. 흔히 그리는 계보는 마다바에게서 파라메슈바라와 그의 아들 다모다라로 내려가고, 다모다라에게서 닐라칸타 소마야지(1444–1544)와 제스타데바가 배웠으며, 닐라칸타의 제자 샹카라 바리야르, 제스타데바의 제자 아추타 피샤라티, 그리고 아추타에게 배운 시인 나라야나 바타티리로 이어집니다. 지식은 주로 산스크리트어 운문으로 적혀 암송되었고, 숫자는 글자로 바꾸어 시구 속에 넣었습니다. 자음마다 0부터 9까지의 숫자 하나를 정해 두고 낱말을 숫자로 읽는 카타파야디(Katapayadi)라는 방식입니다. 글은 습한 기후에서 오래 버티지 못하는 야자잎에 쓰였고, 필요할 때마다 다시 베껴졌습니다. 그 가운데 제스타데바의 『육티바샤』(1530년 무렵)는 예외적으로 이 지방의 말인 말라얄람어 산문으로, 결과만이 아니라 그 근거까지 풀어 쓴 책입니다. 책 이름부터 '근거(육티)의 해설'이라는 뜻입니다.
무엇을 알아냈나. 케랄라 문헌이 마다바의 것으로 전하는 급수를 오늘날의 기호로 쓰면
어떻게 얻었나. 『육티바샤』의 논증은 단위원(unit circle)의 호를 아주 잘게 나누는 데서 시작합니다. 원에 접선(tangent line)을 하나 세우고 그 위에서 탄젠트 값을 재면, 탄젠트가
느린 급수를 빠르게.
보정항 하나가 수백, 수천 항의 일을 대신합니다. 셋째 보정항을 붙이면 수십 항만으로 소수 열 자리 넘게 맞습니다. 이 보정항들이, 분모 속에 다시 분수가 끝없이 들어가는 연분수(continued fraction)를 중간에서 끊어 얻는 근삿값과 같은 모양이라는 점에서, 그 유도를 연분수의 생각으로 설명하는 연구도 있습니다. 느린 급수를 더 오래 더하는 대신 남은 오차 자체를 계산해 버리는 이 태도는 근사와 오차의 오랜 주제입니다.
닐라칸타의 하늘. 학파의 관심은 급수에만 있지 않았습니다. 닐라칸타는 『탄트라상그라하』(1500)에서 전통적인 행성 계산법을 고쳤는데, 그의 모형을 행성들이 태양 둘레를 돌고 그 태양이 지구 둘레를 도는, 한 세기 뒤 덴마크의 천문학자 티코 브라헤가 내놓은 체계와 닮은 그림으로 읽는 연구가 있습니다. 5세기 인도의 수학자이자 천문학자 아리아바타의 책에 붙인 주석에서 그는 원주율의 참값은 끝내 정확히 적을 수 없기 때문에 아리아바타가 근삿값만 주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원주율이 두 정수(integer)의 비로 적을 수 없는 무리수(irrational number)임을 짐작한 듯한 이 대목은 1761년 스위스의 수학자 요한 하인리히 람베르트의 증명보다 250여 년 앞섭니다.
잊히고, 다시 발견되다. 17세기에 들어 학파의 새로운 성과는 뜸해졌습니다.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이어서 영국이 해안의 교역을 장악하면서 옛 후원 구조가 흔들린 것도 한 원인으로 꼽히지만 분명하게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야자잎 사본은 집안의 서고에 남았고, 인쇄되지 않은 산스크리트어와 말라얄람어 문헌은 바깥 세계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1830년대에 영국 동인도회사의 관리 찰스 위시가 이 급수들을 소개하는 논문을 영국 왕립 아시아 학회지에 실었지만 큰 주목을 받지 못했고, 20세기 중반 이후 인도 학자들이 사본을 편집하고 옮기면서 비로소 널리 알려졌습니다.
전파 논쟁. 1498년 바스쿠 다 가마가 희망봉을 돌아 캘리컷에 닿았고, 포르투갈은 코친과 고아에 거점을 세웠습니다. 예수회가 뒤따랐고, 훗날 중국으로 가 조선에까지 닿는 책을 남긴 마테오 리치도 1578–1582년 고아와 코친에 머물렀습니다. 1582년의 그레고리력(Gregorian calendar) 개혁과 먼 바다의 항해에는 정확한 천문 계산이 필요했으니, 예수회가 케랄라의 계산법을 유럽으로 가져갔을 수 있다는 가설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케랄라 문헌을 라틴어나 포르투갈어로 옮긴 기록은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17세기 유럽의 급수는 편지와 원고로 경로가 잘 남아 있습니다. 뉴턴은 1669년의 원고 『해석에 관하여』에서 (1 + x)의 분수 거듭제곱이나 음수 거듭제곱을 무한급수로 펼친 이항급수(binomial series)를 거쳐, 그레고리는 1671년의 편지에서, 라이프니츠는 1670년대 파리에서 한 곡선 아래의 넓이(area)를 다른 곡선 아래의 넓이로 바꿔 계산하는 방법으로 같은 급수에 이르렀습니다. 지금의 증거로 말할 수 있는 것은, 같은 결과가 서로 다른 방법으로 두 번 발견되었다는 것까지입니다.
이어지는 곳. 케랄라의 급수가 어떤 함수든 거듭제곱의 합으로 적는 일반적인 방법이 된 모습은 테일러 급수에서, 그 급수가 어디까지 통하는지는 수렴반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조각을 한없이 잘게 나누어 더하는 논증은 같은 생각을 넓이에 쓰는 리만 합과, 끝없는 과정을 믿을 만하게 다루는 법을 따라가는 무한을 다루는 법에서 이어집니다. 더하는 항이 0으로 줄어들어도 합이 끝없이 커질 수 있다는 무한히 더하는 일의 함정은 조화급수(harmonic series)가, 오차를 계산해 줄이는 생각은 근사와 오차가 보여 줍니다. 이 급수들의 재료가 된 인도의 사인표와 숫자는 바그다드 지혜의 집을 거쳐 서쪽으로도 건너갔고, 같은 급수를 다시 찾은 유럽의 이야기는 편지 공화국과 라이프니츠, 뉴턴의 페이지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