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메이너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
확률(probability)을 증거와 결론 사이의 논리적 관계로 본 『확률론』을 쓰고 젊은 램지의 비판자이자 후원자가 되었으며, 뒤에 『일반 이론』으로 20세기 거시 경제학을 연 케임브리지의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1883년 케임브리지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존 네빌 케인스는 논리학 교과서와 경제학 방법론 책을 쓴 대학의 강사였고, 어머니 플로렌스는 뒤에 케임브리지 시장이 되었습니다. 이튼을 거쳐 1902년 킹스 칼리지에서 수학을 공부했고, 1904년 수학 졸업 시험에서 열두째 성적을 얻었습니다. 그 무렵 케임브리지에서는 앨프리드 마셜이 경제학을 독립(independence)된 학과로 세우고 있었고, 철학에서는 G. E. 무어의 『윤리학 원리』(1903)가 젊은 세대를 사로잡았습니다. 무어는 옳은 행동을 하려면 그 결과를 알아야 하는데 먼 결과는 알 수 없으니 관습을 따르는 편이 낫다고 썼습니다. 스물한 살의 케인스는 이 대목에 반발했습니다. 결과를 확실히 알 수 없을 때에도 무엇을 믿는 것이 합리적인지를 따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확실성 속의 합리적 판단이라는 이 물음이 그의 첫 연구 주제인 확률이 되었고, 평생 그의 경제학 밑바닥에도 깔려 있었습니다.
나이
그는 1903년 비밀 토론 모임 '사도들'의 회원이 되었고, 여기서 만난 리턴 스트레이치, 그리고 버지니아 울프와 화가들이 모인 블룸즈버리 그룹이 평생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1906년 공무원 시험을 거쳐 런던의 인도청에서 일하는 동안에도 틈틈이 확률에 관한 논문을 썼고, 두 번째 시도 끝에 1909년 이 논문으로 킹스 칼리지의 펠로가 되었습니다. 경제학 강의를 맡으면서도 그는 이 원고를 계속 고쳤고, 1914년에는 교정쇄까지 나왔지만 전쟁으로 출판이 밀렸습니다. 『확률론』은 1921년에야 나왔습니다. 20세기 초 케임브리지에서 러셀과 화이트헤드가 수학을 논리 위에 세우려 할 때, 케인스는 확률을 논리의 확장으로 세우려 한 것입니다.
『확률론』의 중심 생각은 이렇습니다. 연역 논리에서 전제
그는 확률에 수를 매길 때 흔히 쓰던 원리에도 이름을 붙여 비판했습니다. 서로 다른 경우를 가를 이유가 없으면 같은 확률을 주라는 원리로, 야코프 베르누이와 라플라스 이래 '이유 불충분의 원리(principle of insufficient reason)'라 불리던 것을 케인스는 무차별 원리라 불렀습니다. 문제는 경우를 어떻게 나누느냐에 따라 답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의 예를 따라가 봅시다. 어떤 물질 1그램이 차지하는 부피가 1과 3 사이라는 것만 안다고 합시다. 무차별 원리(principle of indifference)로는 부피가 1과 2 사이일 확률이 1/2입니다. 그런데 같은 사실을 밀도, 곧 부피의 역수(inverse)로 말하면 밀도는 1/3과 1 사이이고, '부피가 2 이하'는 '밀도가 1/2 이상'과 같은 말입니다. 밀도에 무차별 원리를 쓰면 이 확률은
또 하나의 독창적인 개념이 증거의 무게입니다. 확률과 증거의 양은 다른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처음 보는 동전의 앞면 확률을 물으면 우리는 1/2이라고 답합니다. 천 번 던져 앞면이 500번 나온 동전도 1/2입니다. 두 확률은 같지만, 두 번째 판단이 훨씬 든든한 증거 위에 서 있습니다. 관련 있는 증거가 늘면 확률은 오르거나 내리거나 그대로일 수 있지만, 무게는 언제나 늘어납니다. 그는 이 둘을 섞으면 안 된다고 보았고, 무게가 가벼울 때 사람들이 확률의 수만으로는 설명되지 않게 행동한다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1961년 대니얼 엘스버그는 공의 비율을 아는 항아리와 모르는 항아리 가운데 사람들이 아는 쪽을 고집하는 실험(엘스버그의 역설)을 내놓으며 케인스의 이 개념을 인용했고, 이것은 오늘날 모호성과 불확실성에 관한 의사 결정 이론(decision theory)의 출발점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는 통계(statistics)를 쓰는 추론에도 까다로웠습니다. 1910년 칼 피어슨의 골턴 연구실은 부모의 음주가 자녀의 체격과 지능에 거의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연구를 냈습니다. 마셜은 『타임스』에 비판 편지를 보냈고, 케인스는 왕립통계학회지에 긴 서평을 써서 에든버러와 맨체스터의 몇몇 가정이 전체를 대표하지 못하고 음주를 재는 방법도 거칠다고 지적했습니다. 피어슨은 날카롭게 반박했고, 두 사람은 여러 차례 글을 주고받았습니다(골턴 연구소와 로담스테드). 숫자로 된 상관관계(correlation)가 있어도 표본(sample)이 무엇을 대표하는지 모르면 결론을 믿을 수 없다는 그의 태도는, 1939년 계량 경제학의 개척자 얀 틴베르헌의 회귀 모형을 비판할 때에도 되풀이되었습니다.
『확률론』의 가장 날카로운 비판자는 킹스 칼리지의 학부생 프랭크 램지였습니다. 1922년 열여덟 살의 램지는 학생 잡지의 서평에서, 그리고 1926년 강연 「진리와 확률」에서, 케인스가 말하는 명제들 사이의 논리적 확률(logical probability) 관계가 자기 눈에는 보이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보이지 않는 것 같다고 썼습니다. 램지는 대신 확률을 한 사람이 거는 믿음의 정도로 보고, 그것을 내기에 얼마를 걸겠느냐로 재자고 했습니다. 믿음이 확률의 규칙을 어기는 사람은 어떤 결과가 나와도 잃는 내기의 묶음에 걸려든다는 논증이 주관적 확률(subjective probability), 오늘날 베이즈 통계학의 기초(basics)가 되었습니다. 케인스는 불쾌해하는 대신 이 비판자를 가까이 두었습니다. 1924년 스물한 살의 램지가 킹스 칼리지의 펠로가 되도록 힘썼고, 자신이 편집하던 『이코노믹 저널』에 램지의 과세 이론(1927)과 저축 이론(1928)을 실었습니다. 1930년 램지가 스물여섯 살로 세상을 떠나자 추도문을 썼고, 이듬해 램지의 유고집을 서평하며 '이 점에서 나는 램지에게 양보한다. 그가 옳다고 생각한다'고 적었습니다. 다만 램지가 합리적인 믿음을 믿음 일반과 구별하는 데까지는 아직 성공하지 못했다는 단서도 달았습니다.
케인스는 케임브리지의 사람들을 잇는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1929년 1월 그는 램지와 함께 설득한 비트겐슈타인이 케임브리지로 돌아오자 아내에게 '신이 도착했다. 5시 15분 기차에서 그를 만났다'고 편지를 썼고, 그의 체류와 생계를 도왔습니다. 1927년에는 파시즘을 피해 온 이탈리아 경제학자 피에로 스라파를 케임브리지에 데려왔습니다. 경제학자로서 그는 1911년부터 1945년까지 영국 경제학의 대표 학술지인 『이코노믹 저널』의 편집장이었고, 킹스 칼리지의 재정 담당자로서 칼리지의 돈을 주식에 투자해 크게 불렸습니다. 1936년에는 소더비 경매에서 뉴턴의 연금술 원고를 대량으로 사들였고, 그것을 읽은 뒤 쓴 글에서 뉴턴을 '이성의 시대의 첫 사람이 아니라 마지막 마술사'라고 불렀습니다. 이 원고들은 그의 유언으로 킹스 칼리지에 남았습니다.
그를 세계적인 인물로 만든 것은 경제학입니다. 1차 세계대전 동안 재무부에서 일했고,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 영국 재무부 대표로 갔다가 독일에 물린 배상금이 갚을 수 없을 만큼 크고 유럽을 다시 위기로 몰 것이라며 물러나 『평화의 경제적 귀결』을 썼습니다. 대공황 한가운데서 펴낸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 이론』(1936)은, 경제가 저절로 완전 고용으로 돌아간다는 당시의 믿음과 달리 사회 전체의 지출이 모자라면 실업이 오래 머물 수 있고, 그때는 정부의 지출이 빈자리를 메울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여기에 쓰인 승수의 논리는 등비급수(geometric series) 하나입니다. 사람들이 늘어난 소득의 비율
2차 세계대전 중 그는 다시 재무부의 자문이 되었고, 1942년 남작 작위를 받았으며, 1944년 브레턴우즈 회의에서 영국 대표단을 이끌어 국제 통화 기금과 세계은행의 설계에 참여했습니다. 전후 미국의 차관을 협상하느라 과로한 끝에 1946년 4월 서식스의 시골집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확률론에서 그의 논리적 해석은 해럴드 제프리스와 루돌프 카르나프의 귀납 논리로 이어졌고, 램지와 브루노 데 피네티의 주관적 해석에 밀려 한동안 잊혔다가, 확률을 한 수 대신 범위로 다루는 부정확 확률과 모호성의 연구에서 다시 읽히고 있습니다. 경제학에서 그의 이름은 한 학파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1923년 『화폐 개혁론』에서 장기적인 균형만 말하는 경제학자들을 두고 쓴 '장기적으로 우리는 모두 죽는다'는 문장은 지금도 그의 가장 유명한 말로 남아 있습니다.
이어지는 곳. 그가 확률을 적은 방식은 조건부 확률이고, 그의 비판자 램지의 길은 베이즈 정리(Bayes' theorem)와 램지의 페이지에서 이어집니다. 무차별 원리의 역설에 대한 한 가지 답은 최대 엔트로피 원리이고, 불확실성을 수로 다루는 긴 이야기는 무작위성에 있습니다. 승수의 셈은 등비급수이며, 그가 살았던 세계는 20세기 초 케임브리지입니다.
관계.
- 논쟁 프랭크 램지 — 램지는 1922년과 1926년 그의 논리적 확률을 비판했고, 케인스는 이 비판자를 킹스 칼리지 펠로로 밀고 그의 경제학 논문 두 편을 『이코노믹 저널』에 실었으며, 1931년에는 확률에 대해 램지가 옳다고 인정했습니다.
- 편지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 오랜 친구로 편지를 주고받았고, 1929년 램지와 함께 비트겐슈타인이 케임브리지로 돌아오도록 애쓰며 그의 체류와 생계를 도왔습니다.
- 영향을 받음 버트런드 러셀 — 『확률론』 서문에서 무어, 러셀, W. E. 존슨에게 진 빚을 밝혔고, 러셀의 논리학처럼 확률도 명제들 사이의 관계로 다루려 했습니다.
- 논쟁 칼 피어슨 — 1910–11년 피어슨의 연구실이 낸 부모의 음주와 자녀의 관계에 관한 통계 연구를 표본과 측정의 결함을 들어 비판하고, 피어슨과 반박을 주고받았습니다.
- 영향을 받음 피에르시몽 라플라스 — 『확률론』에서 라플라스의 고전적 확률과 '이유 불충분의 원리', 계승 규칙(rule of succession)을 하나하나 검토하며 그 한계를 비판했습니다.
연표.
- 1902년 케임브리지 킹스 칼리지에 들어가 수학을 공부하다
- 1903년 토론 모임 '사도들'의 회원이 되다
- 1906년 인도청의 공무원이 되어 틈틈이 확률을 연구하다
- 1909년 확률에 관한 논문으로 킹스 칼리지의 펠로가 되다
- 1911년 『이코노믹 저널』의 편집장이 되다
-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서 물러나 『평화의 경제적 귀결』을 펴내다
- 1921년 『확률론』을 펴내다
- 1924년 램지가 킹스 칼리지의 펠로가 되도록 힘쓰다
- 1936년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 이론』을 펴내고 뉴턴의 원고를 사들이다
- 1944년 브레턴우즈 회의에서 영국 대표단을 이끌다
이 인물이 나오는 긴 글
이 인물을 언급하는 페이지
- 최대 엔트로피 원리
… 원리'가 그 특별한 경우입니다. 야코프 베르누이와 라플라스가 확률을 매길 때 쓴 원리로, 1921년케인스가 '무차별의 원리'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습니다. 제인스가 브랜다이스 대학 강의에서 든 예라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