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버클리(George Berkeley)
아일랜드의 철학자이자 국교회 주교.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라는 관념론을 세웠고, 『분석가』에서 미적분(calculus)의 무한소(infinitesimal)를 '사라진 양들의 유령'이라 비판해 해석학(mathematical analysis)의 기초(basics)를 다시 묻게 했다.
조지 버클리는 1685년 아일랜드 킬케니 근처에서 태어났습니다. 아일랜드는 잉글랜드 왕이 다스리고 국교회 신자인 소수(prime number)가 가톨릭 다수를 지배하던 땅이었고, 버클리는 그 국교회 쪽 집안의 아들이었습니다. 열다섯 살에 더블린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들어가 1707년 펠로가 되었습니다. 그가 청년이던 때 유럽의 지식인들은 두 사람의 책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세계를 물질 입자와 그 운동으로 설명하는 뉴턴의 『프린키피아』(1687)와,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은 감각에서 온 관념이라고 한 로크의 『인간 지성론』(1690)입니다. 버클리는 로크에서 출발해 뉴턴의 물질 세계를 의심했고, 그 의심은 평생 수학으로도 향했습니다.
나이
1710년의 『인간 지식의 원리』에서 그는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우리가 사과에서 아는 것은 빨간색, 둥근 모양, 단맛 같은 지각뿐이며, 그 모든 지각 뒤에 따로 있는 '물질'이라는 것은 누구도 본 적이 없다. 그러니 감각할 수 있는 사물에게 존재한다는 것은 지각된다는 것이다(esse est percipi). 아무도 보지 않는 방의 책상은 어떻게 되느냐는 반문에 그는 신이 언제나 지각하고 있다고 답했습니다. 이 비물질론(immaterialism)은 당대에 기이한 주장으로 조롱받기도 했지만, 경험에서 출발하는 영국 철학의 흐름에서 로크와 흄 사이를 잇는 고리가 되었습니다.
이 철학은 곧바로 수학의 문제가 되었습니다. 버클리는 머릿속에 그릴 수 없는 추상 관념을 믿지 않았습니다. 길이가 있는 선분을 끝없이 둘로 나눌 수 있다는 기하학의 가정도 그에게는 의심스러웠습니다. 눈으로 볼 수 있는 가장 작은 점, 곧 지각의 최소 단위보다 작은 것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1709년의 『새로운 시각 이론』에서는 우리가 거리를 직접 보는 것이 아니라 눈의 긴장과 흐릿함 같은 단서에서 배워서 판단한다고 논했고, 1721년의 『운동에 관하여』에서는 뉴턴의 절대 공간, 곧 물체와 상관없이 그 자체로 있는 텅 빈 틀은 지각할 수 없으니 물리학에 필요 없다고 비판했습니다. 이 비판은 한 세기 반 뒤 물리학자 마흐에게서 다시 나타납니다.
1720년대의 버클리는 뜻밖의 계획에 뛰어들었습니다. 버뮤다에 대학을 세워 아메리카 식민지의 이주민과 원주민에게 교육과 신앙을 전하겠다는 것입니다. 의회가 2만 파운드를 약속하자 그는 1728년 대서양을 건너 로드아일랜드의 뉴포트에 집을 짓고 돈을 기다렸지만, 돈은 끝내 오지 않았습니다. 1731년 런던으로 돌아온 그는 1733년 뉴포트의 농장과 장서를 예일 대학에 기증했습니다. 이 계획을 품던 1726년 무렵 쓴 시의 한 구절, "제국의 길은 서쪽으로 간다"는 1866년 캘리포니아의 한 대학 도시가 그의 이름을 따 버클리라 불리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1734년 그는 아일랜드 남쪽 클로인의 주교가 되었고, 같은 해 『분석가』를 냈습니다. 부제는 '믿음 없는 수학자에게 보내는 글'이었습니다. 그 수학자가 뉴턴의 친구이자 천문학자인 핼리라는 이야기가 전하지만 확실하지 않습니다. 버클리의 동기는 신학적이었습니다. 신앙의 신비를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비웃는 수학자들에게, 당신들의 미적분에도 이해할 수 없는 신비가 가득하다고 돌려준 것입니다. 그는 뉴턴의 유율(fluxion)과 라이프니츠의 무한히 작은 차이를 차례로 들여다보고, 둘 다 생각할 수 없는 대상 위에 서 있다고 결론지었습니다.
그의 논증을 가장 간단한 예로 따라가 봅시다.
이 책은 영국 수학자들 사이에 긴 논쟁을 불렀습니다. 의사 제임스 저린, 수학자 벤저민 로빈스가 곧바로 반박했고, 턴브리지 웰스의 목사 토머스 베이즈도 1736년 이름 없이 수학자들을 변호하는 책을 냈습니다. 가장 무게 있는 답은 스코틀랜드의 매클로린이 1742년에 낸 두 권짜리 『유율론』이었습니다. 매클로린은 무한소를 쓰지 않고 고대 그리스의 기하학적 엄밀함, 곧 아르키메데스식의 논증으로 유율법(method of fluxions) 전체를 다시 세우려 했습니다. 오늘날 매클로린 급수라 부르는, 0에서 전개한 테일러 급수(Taylor series)도 이 책에 실려 있습니다. 대륙에서는 달랑베르가 『백과전서』의 항목에서 미분(differentiation)을 극한(limit)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적었습니다.
버클리의 질문에 대한 오늘날의 답은 19세기에 나왔습니다. 핵심은 o를 '0으로 두는' 일을 아예 하지 않는 것입니다. o가 0이 아닌 동안
말년의 버클리는 뜻밖에도 약으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1744년의 『사이리스』는 소나무 타르를 우린 물이 온갖 병에 좋다는 권유로 시작해 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의 우주론으로 끝나는 책인데, 그의 저서 가운데 당대에 가장 많이 팔렸습니다. 그는 1752년 옥스퍼드로 옮겨 이듬해 그곳에서 죽었습니다. 철학에서 그의 비물질론은 흄의 회의론으로 이어졌고, 칸트는 자신의 관념론이 버클리의 것과 다르다는 것을 여러 번 강조해야 했습니다.
수학의 입장에서 버클리는 흔치 않은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새 정리를 증명하지 않았지만, 잘 작동하는 방법이 왜 옳은지 아무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가장 날카롭게 짚었습니다. 18세기의 수학자들은 결과가 맞는다는 데 기대어 계속 나아갔고, 그 빚은 19세기의 엄밀화가 갚았습니다. 무한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라는 그의 질문은 칸토어의 집합론(set theory)과 20세기의 수학 기초론 논쟁(debate on the foundations of mathematics)에서 모양을 바꾸어 되풀이됩니다.
이어지는 곳. 버클리의 반론에 대한 답은 극한과 미분, 평균 변화율(average rate of change)에서, 무한히 작은 양을 쓰지 않고 미적분을 세우는 이야기는 연속성(continuity)과 점별 수렴과 균등 수렴(pointwise and uniform convergence)에서 볼 수 있습니다. 무한을 둘러싼 긴 논쟁은 무한을 다루는 법에 있습니다. 같은 논쟁의 반대편에 선 사람들은 뉴턴, 토머스 베이즈, 코시의 페이지에 있습니다.
관계.
- 논쟁 아이작 뉴턴 — 『분석가』의 주된 과녁은 뉴턴의 유율법으로, 계산 도중 0이 아니던 증분을 끝에서 0으로 치는 논리를 공격했습니다. 뉴턴은 이미 죽은 뒤였고 답은 그의 추종자들이 했습니다.
- 논쟁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 — 『분석가』는 라이프니츠의 무한히 작은 차이, 곧 미분 dx도 같은 이유로 이해할 수 없는 양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연표.
- 1700년 더블린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들어가다
- 1707년 트리니티 칼리지의 펠로가 되고 짧은 수학 논집을 내다
- 1709년 『새로운 시각 이론』을 내다
- 1710년 『인간 지식의 원리』를 내다
- 1721년 뉴턴의 절대 공간을 비판한 『운동에 관하여』를 내다
- 1728년 버뮤다에 대학을 세우려고 아메리카의 로드아일랜드로 건너가다
- 1731년 약속된 정부 자금이 오지 않아 런던으로 돌아오다
- 1734년 클로인의 주교가 되고 『분석가』를 내다
- 1744년 타르 물의 효능을 다룬 『사이리스』를 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