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 H. 하디(G. H. Hardy)
대륙의 엄밀한 해석학(mathematical analysis)을 영국에 들여오고, 리틀우드와 라마누잔과 함께 소수(prime number)와 분할수(partition number)를 복소해석으로 다루는 해석적 정수론(analytic number theory)을 이끌었으며, 『어느 수학자의 변명』으로 순수 수학의 아름다움을 옹호한 영국의 수학자.
고드프리 해럴드 하디는 1877년 런던 남쪽 서리의 크랜리에서 태어났습니다. 부모는 모두 교사였고, 그는 어려서부터 교회 찬송가 번호를 소인수분해(prime factorization)하며 놀았다고 전합니다. 윈체스터 학교를 거쳐 1896년 케임브리지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들어갔습니다. 그 무렵 영국 수학은 뉴턴과 라이프니츠의 우선권 다툼 이래 한 세기 넘게 대륙과 떨어져 있었습니다. 케임브리지의 자랑인 수학 졸업 시험 트라이포스는 교묘한 문제를 빨리 푸는 기술을 겨루는 시험이었고, 코시와 바이어슈트라스 이래 대륙에서 다져진 엄밀한 해석학이나 리만의 복소해석은 거의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1896년 프랑스의 아다마르와 벨기에의 드 라 발레 푸생이 소수 정리(prime number theorem)를 증명했을 때 영국에는 그 증명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드물었습니다.
나이
하디는 시험 준비를 위해 개인 교사에게 문제 풀이 훈련을 받았지만, 한 교수의 권유로 프랑스의 카미유 조르당이 쓴 『해석학 강의』를 읽고 처음으로 수학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고 회고했습니다. 1898년 트라이포스에서 네 번째 성적을 얻었고, 1900년 트리니티의 펠로가 되었습니다. 뒷날 그는 등수를 신문에 발표하는 트라이포스 제도를 없애는 운동에 앞장섰고, 등수 공개는 1909년을 마지막으로 사라졌습니다. 1908년 그가 쓴 『순수 수학 강좌』는 극한(limit), 연속성(continuity), 급수(series)의 수렴(convergence)을 대륙식으로 엄밀하게 가르친 첫 영어 교과서로, 수십 년 동안 영국 학생들의 해석학 입문서였습니다.
같은 1908년 그는 전혀 다른 분야에 작은 흔적을 남겼습니다. 크리켓 친구인 유전학자 레지널드 퍼넷이, 우성 형질은 왜 세대를 거듭하며 인구 전체로 퍼지지 않느냐는 물음을 들고 온 것입니다. 하디는 『사이언스』에 짧은 편지를 써서 답했습니다. 한 유전자에 두 가지 형태 A와 a가 있고 그 비율이 p와 q(p + q = 1)라 합시다. 짝짓기가 무작위라면 다음 세대의 AA, Aa, aa의 비율은 이항 전개 (p + q)² = p² + 2pq + q²에 따라 각각 p², 2pq, q²입니다. 이 세대에서 다시 A의 비율을 세면 p² + pq = p(p + q) = p로 처음과 같습니다. 예를 들어 p = 0.9이면 81%, 18%, 1%의 비율이 대대로 그대로 유지됩니다. 우성이든 열성이든 비율 자체는 변하지 않으며, 비율을 바꾸는 것은 선택이나 돌연변이 같은 다른 힘이라는 것입니다(확률, probability). 같은 해 독일의 의사 빌헬름 바인베르크도 같은 결과를 얻어, 이것은 하디–바인베르크 법칙(Hardy–Weinberg principle)이라 불리며 집단 유전학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쓸모없는' 수학을 자랑한 사람의 가장 널리 쓰이는 결과가 된 셈입니다.
1911년 무렵부터 그는 여덟 살 아래의 리틀우드와 공동 연구를 시작해 35년 동안 백 편 가까운 논문을 함께 썼습니다. 덴마크의 수학자 하랄 보어는 두 사람이 정해 두었다는 '공리(axiom)'를 전했습니다. 서로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이 맞든 틀리든 상관없고, 받은 편지를 읽거나 답할 의무도 없으며, 같은 문제를 동시에 생각하지 않도록 하고, 함께 쓴 논문은 누가 얼마나 기여했든 둘의 이름으로 낸다는 것입니다. 두 사람은 급수의 합, 푸리에 급수(Fourier series), 부등식, 그리고 무엇보다 소수의 분포를 다루었습니다(20세기 초 케임브리지).
소수 연구의 한가운데에는 리만 제타 함수(Riemann zeta function)가 있었습니다. 1859년 리만은 소수가 얼마나 고르게 퍼져 있는지가 이 함수(function)가 0이 되는 점들의 위치에 달려 있음을 보였고, 그 점들이 모두 실수부(real part)가 1/2인 직선(임계선, critical line) 위에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습니다. 이 가설은 소수 정리의 근사가 틀리는 정도가 대략 √x 크기(정확히는 √x · log x의 상수배)를 넘지 않는다는 것과 같고, 이것은 바랄 수 있는 거의 가장 좋은 오차입니다. 1914년 하디는 그 직선 위에 영점(zero)이 무한히 많다는 것을 처음으로 증명했고, 1921년 리틀우드와 함께 높이 T까지 임계선 위의 영점이 적어도 T에 비례하는 만큼 있음을 보였습니다. 가설 자체는 지금도 풀리지 않았습니다. 하디는 폭풍우 속에 북해를 건너기 전, 리만 가설(Riemann hypothesis)을 증명했다는 엽서를 친구에게 보냈다는 이야기가 전합니다. 신이 그런 영광을 그에게 주지 않으려고 배를 가라앉히지는 않을 것이라는 농담이었다는데, 이 이야기는 확인할 길이 없는 일화입니다.
1913년 1월 그는 인도 마드라스 항만청의 서기 스리니바사 라마누잔에게서 증명 없는 공식으로 가득한 편지를 받았습니다. 리틀우드와 함께 편지를 검토한 그는, 연분수(continued fraction)에 관한 몇 공식은 참이 아니라면 아무도 지어낼 상상력을 가질 수 없었을 것이라고 판단했고, 이듬해 라마누잔을 케임브리지로 불렀습니다. 두 사람은 1918년 자연수(natural number) n을 자연수의 합으로 쪼개는 방법의 수 p(n)을 거의 정확히 주는 공식을 얻었습니다(정수(integer)의 분할). p(n)을 계수로 가진 생성함수(generating function)를 복소평면(complex plane)의 원 위에서 적분(integral)하되, 원을 1의 거듭제곱근(roots of unity) 가까이의 작은 호들로 나누어 각 호에서 주된 항을 뽑아 더하는 방법입니다. 이 공식은 퍼시 맥마흔이 손으로 계산한 p(200) = 3,972,999,029,388과 맞았습니다. 하디는 수학자들의 재능을 매긴 자기만의 점수에서 자신에게 25점, 리틀우드에게 30점, 힐베르트에게 80점, 라마누잔에게 100점을 주었다고 전합니다. 라마누잔은 1919년 병든 몸으로 인도로 돌아가 이듬해 세상을 떠났습니다.
'원 방법(circle method)'이라 불리게 된 이 기법을 하디와 리틀우드는 1920년대 「수의 분할」이라는 연작 논문에서 크게 넓혔습니다. 모든 자연수를 k제곱수(perfect square) 몇 개의 합으로 쓸 수 있다는 워링 문제(Waring's problem)에 대해 그 방법의 수를 세는 공식을 얻었고, 1923년에는 차가 2인 쌍둥이 소수(twin primes)가 x까지 대략 몇 쌍 있어야 하는지를 예측하는 추측을 내놓았습니다(쌍둥이 소수). 이 예측은 계산으로 확인할 수 있는 범위에서 실제 개수와 잘 맞지만, 쌍둥이 소수가 무한히 많다는 것조차 아직 증명되지 않았습니다. 1937년 소련의 이반 비노그라도프는 원 방법으로 충분히 큰 홀수는 모두 세 소수의 합이라는 것을 증명했고, 2013년 하랄드 헬프고트는 그 '충분히 큰'을 없애 5보다 큰 모든 홀수로 완성했습니다(소수, 정수론(number theory)).
그는 크리켓을 무엇보다 사랑했고, 자기 얼굴이 비치는 거울을 싫어해 호텔 방의 거울을 수건으로 덮었다는 이야기가 전합니다. 무신론자였고 1차 세계대전 동안 평화주의자로 남았습니다. 1916년 반전 운동을 하던 러셀이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쫓겨나자 그는 칼리지에 크게 실망했고, 1919년 옥스퍼드 대학의 새빌 석좌교수로 옮겼습니다. 옥스퍼드 시절은 그의 가장 행복한 때였다고 합니다. 1931년 케임브리지의 새들러 석좌교수로 돌아왔고, 1942년에는 러셀 해임 사건(event)의 경위를 정리한 소책자를 썼습니다. 메리 카트라이트, 에드워드 티치마시 같은 제자를 길렀고, 1913–14년 케임브리지를 찾은 미국의 젊은 노버트 위너도 그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1934년에는 리틀우드, 헝가리 출신의 조지 폴리아와 함께 『부등식』을 펴냈습니다.
1940년, 전쟁과 병으로 연구를 거의 할 수 없게 된 그는 『어느 수학자의 변명』을 썼습니다. 수학은 화가나 시인처럼 패턴을 만드는 일이며, 아름다움이 첫째 시험이고 추한 수학이 설 영원한 자리는 세상에 없다고 그는 썼습니다. 그리고 정수론 같은 참된 수학은 전쟁에 아무 쓸모가 없다고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역사는 그를 배반했습니다. 그가 똑같이 '쓸모없는' 예로 든 상대성 이론은 원자폭탄과 위성 항법으로 이어졌고, 반세기가 지나지 않아 소수의 성질은 RSA 암호(RSA cryptosystem)의 자물쇠가 되었습니다. 1947년 12월 케임브리지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남긴 것은 한 나라의 수학 문화입니다. 그가 들여온 엄밀한 해석학과 해석적 정수론은 리틀우드, 카트라이트, 티치마시, 앨버트 잉엄, 해럴드 대븐포트로 이어지는 영국 해석학파가 되었고, 에드워드 라이트와 함께 쓴 1938년 교과서 『정수론 입문』은 지금도 읽힙니다. 원 방법은 오늘날에도 정수론의 기본 도구이고, 주된 항과 오차를 나누어 따로 누르는 그의 방식은 근사와 오차의 전형으로 남았습니다.
이어지는 곳. 소수가 얼마나 있는지는 소수, 소수 정리, 리만 제타 함수, 쌍둥이 소수에서, 분할수와 원 방법은 정수의 분할과 생성함수에서 이어집니다. 동료 리틀우드와 라마누잔, 그들이 함께 있던 20세기 초 케임브리지도 함께 읽어 보세요.
관계.
- 함께 연구 J. E. 리틀우드 — 1911년 무렵부터 35년 동안 백 편 가까운 논문을 함께 쓰며 급수, 소수 분포, 워링 문제, 부등식을 다루었습니다.
- 함께 연구 스리니바사 라마누잔 — 1913년 그의 편지를 받고 케임브리지로 불러, 1918년 분할수의 공식과 원 방법을 함께 만들었습니다.
- 영향을 받음 베른하르트 리만 — 리만 가설을 평생의 과제로 삼아 1914년 제타 함수(zeta function)의 영점이 임계선 위에 무한히 많음을 증명했습니다.
- 영향을 줌 노버트 위너 — 1913–14년 케임브리지에서 그의 강의를 들은 위너는 뒷날 하디와 리틀우드의 타우버 정리를 크게 일반화했습니다.
연표.
- 1896년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에 들어가다
- 1900년 트리니티 칼리지의 펠로가 되다
- 1908년 『순수 수학 강좌』를 펴내고 유전의 하디–바인베르크 법칙을 발표하다
- 1911년 리틀우드와 공동 연구를 시작하다
- 1913년 라마누잔의 편지를 받다
- 1914년 제타 함수의 영점이 임계선 위에 무한히 많음을 증명하다
- 1918년 라마누잔과 함께 분할수의 공식을 발표하다
- 1919년 옥스퍼드 대학의 새빌 석좌교수가 되다
- 1931년 케임브리지의 새들러 석좌교수로 돌아오다
- 1934년 리틀우드, 폴리아와 『부등식』을 펴내다
- 1940년 『어느 수학자의 변명』을 펴내다
이 인물이 나오는 긴 글
이 인물을 언급하는 페이지
- 쌍둥이 소수
… 식으로 작은 소수들로 나눈 나머지를 따져 확률을 보정하면 쌍둥이 개수의 예측이 나옵니다. 1923년 영국의하디와 리틀우드가 내놓아 하디–리틀우드 추측이라 부르는 이 예측으로는 지금 쌍입니다. x 가 커질수록 실제 …
- 분할수
… 어떤 다항식보다도 빨리 커집니다. p(100) = 190,569,292입니다. 1918년 영국의 수학자하디와 인도 출신의 라마누잔은 p(n) \sim …
- 급수의 수렴과 발산
… 않았습니다. 부분합들의 평균이 어디로 가는지 보는 방법(체사로 합)은 그란디의 급수에 ½을 매기고,하디는 1949년의 책 『발산 급수』에서 이런 합산법들을 정리했습니다. 라마누잔이 하디에게 보낸 편지에 …
- 정수론
… 두 세계를 잇는 대수적 정수론의 결과입니다. 쓸모없던 수학에서 암호로 20세기 초 케임브리지의하디와 리틀우드는 해석적 정수론을 정교한 기술로 만들었고, 1913년 인도에서 편지를 보낸 라마누잔과 …
- 일반 상대성 이론
… 사건 지평선 망원경이 2017년에 관측한 은하 M87 중심 블랙홀의 그림자 사진을 공개했습니다.하디가 1940년 전쟁에 쓰일 데가 없다고 했던 두 분야, 정수론과 상대성 이론은 오늘날 각각 암호와 위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