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 개념 지도
시대와 장소(Times and places)

왕립학회와 과학 아카데미(The Royal Society and the Scientific Academies)

17–18세기 유럽의 왕과 귀족이 세운 과학 단체들. 런던 왕립학회, 파리 과학 아카데미, 베를린과 페테르부르크의 아카데미가 학술지와 현상 공모와 봉급으로 학자들을 먹여 살렸고, 오일러와 라그랑주는 이 궁정들 사이를 오가며 해석학⁠(mathematical analysis)⁠을 넓혔다.

17세기 중반까지 수학으로 먹고살 길은 좁았습니다. 대학은 신학과 법학과 의학을 가르치는 곳이었고 수학 교수 자리는 손에 꼽을 만큼 적었으며, 새 발견은 학자들 사이의 편지로 퍼졌습니다(편지 공화국). 1660년 런던에서 시작해 한 세기 동안 유럽 곳곳에 생긴 과학 단체들, 곧 왕립학회와 과학 아카데미들이 이 사정을 바꾸었습니다. 이들은 발견을 인쇄해 기록으로 남기는 학술지와, 문제를 내걸고 상금을 주는 현상 공모와, 무엇보다 연구만 하고도 살 수 있는 봉급을 만들었습니다. 18세기의 해석학이 대학이 아니라 궁정의 학술원에서 자란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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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0년 11월 런던의 그레셤 칼리지에서 천문학자이자 건축가 크리스토퍼 렌의 강연을 들은 열두 명이 실험으로 자연을 배우는 모임을 만들기로 했고, 1662년 찰스 2세의 칙허를 받아 왕립학회가 되었습니다. 이름과 달리 왕은 돈을 대지 않았습니다. 회원의 회비로 꾸린 단체였고, 회원의 다수는 여유 있는 신사 애호가였습니다. 표어 "누구의 말도 그대로 믿지 말라(Nullius in verba)"는 권위 대신 실험과 증거를 보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1665년에는 서기 헨리 올덴부르크가 『철학 회보』를 펴내기 시작했습니다. 같은 해 1월 파리에서 나온 『학자들의 잡지』와 함께 가장 오래된 과학 학술지로 꼽힙니다. 편지로 오가던 소식이 날짜가 찍힌 인쇄물이 되자, 누가 먼저 발견했는지를 기록으로 따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학회의 가난은 뉴턴의 『프린키피아』(1687)에서도 드러납니다. 학회는 출판을 승인했지만 앞서 낸 물고기 책으로 돈이 바닥나 있어서, 인쇄비는 천문학자 에드먼드 핼리가 자기 돈으로 댔습니다. 뉴턴은 1703년 학회장이 되어 죽을 때까지 자리를 지켰고, 미적분⁠(calculus)⁠의 우선권을 두고 라이프니츠와 다툴 때 1712년 학회가 낸 보고서의 초안을 직접 썼습니다. 학회는 외국인에게도 문을 열었습니다. 프랑스에서 종교 박해를 피해 건너온 위그노 드무아브르는 1697년 회원이 되었지만 대학의 자리는 끝내 얻지 못해, 개인 교습과 도박사들을 위한 확률⁠(probability)⁠ 계산으로 생계를 꾸렸습니다. 그가 동전을 아주 많이 던질 때 앞면 수의 분포가 종 모양 곡선에 가까워진다는 것을 보인 것이 정규분포⁠(normal distribution)⁠의 시작입니다. 1763년 목사이자 수학자 토머스 베이즈가 남긴 원고, 곧 결과를 보고 그 원인의 확률을 거꾸로 따지는 방법이 친구 리처드 프라이스의 손을 거쳐 발표된 곳도 『철학 회보』였습니다(베이즈 정리⁠, Bayes' theorem⁠).

파리 과학 아카데미는 반대의 길을 걸었습니다. 1666년 루이 14세의 재상 콜베르가 세운 이 기관의 회원들은 왕에게서 연금을 받는 직업 과학자였고, 그 대가로 왕이 맡기는 문제에 답해야 했습니다. 콜베르는 네덜란드의 하위헌스와 이탈리아의 천문학자 조반니 카시니를 불러오며 국적보다 실력을 샀습니다. 항해와 지도, 요새와 운하가 국가의 일이었고 아카데미는 그 계산을 맡았습니다. 1730년대에는 지구가 극 쪽으로 납작한지 길쭉한지를 가리려고 북극권의 라플란드와 적도 가까운 페루로 원정대를 보내 위도 1°에 해당하는 자오선⁠(meridian)⁠의 길이를 쟀고, 납작하다는 뉴턴 쪽의 예측이 맞았습니다(구면기하⁠(spherical geometry)⁠). 1720년대부터는 기부금으로 해마다 현상 문제를 내걸었습니다. 배의 돛대를 어떻게 세울지, 달의 운동과 조석을 어떻게 설명할지 같은 문제였고, 응모자는 이름 대신 표어를 적어 유럽 어디서든 보낼 수 있었습니다. 스무 살의 오일러가 처음 이름을 알린 것이 1727년 돛대 문제에서 가작으로 뽑힌 일이었고, 바젤의 베르누이 집안과 오일러는 그 뒤 이 상을 여러 번 받았습니다. 1772년 라그랑주가 받은 것도 이 상입니다. 세 천체가 서로 끌어당기며 움직이는 삼체 문제⁠(three-body problem)⁠는 일반적으로 식으로 풀리지 않는데, 그는 세 천체가 정삼각형이나 한 직선을 이룬 모양 그대로 함께 도는 특수한 해를 찾았습니다.

베를린 아카데미는 1700년 라이프니츠의 설득으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 이듬해 프로이센의 첫 왕이 되는 사람이 세웠고, 라이프니츠가 첫 원장이 되었습니다. 돈줄이 특이했습니다. 아카데미는 프로이센에서 달력을 파는 독점권을 받아 그 수입으로 살았습니다. 달력을 만들려면 천문 계산이 필요하니 수학이 곧 재원이었던 셈입니다. 한동안 시들던 아카데미를 1740년 즉위한 프리드리히 2세가 되살렸습니다. 그는 1741년 페테르부르크의 오일러를 불러오고, 1746년 프랑스의 수학자이자 라플란드 원정대장이던 피에르 모페르튀이를 원장으로 앉혔습니다. 오일러는 25년 동안 논문을 쏟아내는 한편 달력과 천문대, 아카데미의 살림을 챙기고, 복권과 연금과 운하에 관한 왕의 실무 문의에도 답했습니다. 1740년 베를린의 수학자 필리프 나우데가 던진 수의 분할 문제, 곧 자연수⁠(natural number)⁠를 더 작은 자연수들의 합으로 나누는 방법이 몇 가지인가(4 = 3 + 1 = 2 + 2 = 2 + 1 + 1 = 1 + 1 + 1 + 1이니 4까지 합쳐 다섯 가지)라는 물음에 답하려고 오일러가 수열 전체를 한 식의 계수로 담는 생성함수⁠(generating function)⁠를 쓴 것처럼(분할수⁠, partition number⁠), 이런 자리에서는 실무와 순수 수학의 경계가 흐렸습니다.

1750년대 초 이 아카데미는 추한 소동을 겪었습니다. 모페르튀이는 자연이 운동 전체에 걸친 어떤 양을 늘 가장 작게 한다는 '최소 작용의 원리⁠(principle of least action)⁠'를 내세웠는데, 수학자 요한 사무엘 쾨니히가 라이프니츠의 편지에 같은 생각이 먼저 있다고 주장하자 아카데미는 1752년 그 편지를 위조로 판정했습니다. 볼테르가 모페르튀이를 조롱하는 풍자문을 쓰자 왕은 그 책을 공개적으로 불태우게 했습니다. 소동은 잊혔지만 물음은 남았습니다. 수 하나가 아니라 경로 전체를 바꿔 가며 가장 좋은 것을 찾는 문제는 오일러와 라그랑주의 변분법⁠(calculus of variations)⁠으로 정밀해졌고(최적화⁠, optimization⁠), 라그랑주는 1766년 오일러의 자리를 이어받아 21년 동안 베를린에서 일했습니다. 베를린의 논문집에는 파리의 달랑베르가 떨리는 줄의 방정식을 처음 적은 1747년 논문(파동방정식⁠, wave equation⁠)과, π가 두 정수⁠(integer)⁠의 비로 적을 수 없는 무리수⁠(irrational number)⁠임을 분모 속에 분수가 끝없이 들어가는 연분수⁠(continued fraction)⁠로 증명한 스위스 태생의 수학자 요한 하인리히 람베르트의 논문이 실렸습니다. 람베르트는 베를린에서 평행선 공준⁠(parallel postulate)⁠을 부정하면 무엇이 따라 나오는지도 파고들었습니다.

러시아에는 대학도 학자도 거의 없었습니다. 서유럽을 따라잡으려던 표트르 대제는 학자를 수입하기로 하고 1724년 아카데미 설립을 명했고, 아카데미는 그가 죽은 뒤인 1725년 문을 열었습니다. 첫 회원은 거의 모두 독일어권과 스위스 사람이었습니다. 바젤의 수학자 집안 베르누이가의 다니엘 베르누이와 형 니콜라우스가 1725년에 왔고, 형이 이듬해 죽자 다니엘의 추천으로 스무 살의 오일러가 1727년 합류했습니다. 오일러는 여기서 1735년 바젤 문제⁠(Basel problem)⁠를 풀고 쾨니히스베르크의 다리 문제로 그래프 이론을 열었으며(오일러 경로⁠, Euler path⁠), 1737년 곱 공식을 찾았습니다. s가 1보다 큰 실수일 때 모든 자연수에 걸친 합 1+12s+13s+⋯1 + \tfrac{1}{2^s} + \tfrac{1}{3^s} + \cdots이 모든 소수⁠(prime number)⁠ p에 걸친 곱 ∏p11−p−s\prod_p \tfrac{1}{1 - p^{-s}}과 같다는 식으로(s = 1이면 양쪽 모두 끝없이 커집니다), 모든 자연수가 소수들의 곱으로 한 가지로만 나뉜다는 사실을 무한한 합과 곱의 등식으로 적은 것입니다(제타 함수⁠(zeta function)⁠, 소수). 1738년 아카데미 논문집에 실린 다니엘의 논문은 오늘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역설⁠(St. Petersburg paradox)⁠'이라 부르는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동전을 던져 처음 앞면이 나올 때까지 던진 횟수가 k이면 2ᵏ두카트를 받는 내기는, 받을 돈의 기댓값⁠(expected value)⁠이 1 + 1 + 1 + ⋯로 끝없이 커지는데도 아무도 여기에 큰돈을 걸지 않습니다. 다니엘은 돈의 쓸모가 로그처럼 늘어난다는 답을 내놓았습니다(기댓값). 1758년 수학자 요한 안드레아스 제그너가 볼록 다각형⁠(convex polygon)⁠을 대각선으로 삼각형들로 나누는 방법의 수를 앞의 값들로 구하는 식(점화식⁠(recurrence relation)⁠)을 보낸 곳도 이 아카데미였습니다(카탈랑 수⁠, Catalan number⁠).

이 기관들은 서로 이어진 하나의 시장이었습니다. 이름난 학자는 여러 아카데미의 회원을 겸했고, 논문집은 서로 교환되었으며, 현상 공모는 유럽 전체의 경연이었습니다. 왕들은 학자를 영입하려고 봉급과 집을 내걸었고, 학자들은 후원자의 운명을 따라 움직였습니다. 오일러는 러시아의 정정이 불안해지자 베를린으로 갔다가 예카테리나 2세의 후한 초청으로 1766년 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갔습니다. 토리노의 포병 학교 교사였던 라그랑주는 1766년 베를린으로, 1786년 프리드리히 2세가 죽자 이듬해 파리로 옮겼습니다. 파리에서는 라플라스와 르장드르가 아카데미의 현상 공모와 측량 사업으로 경력을 쌓았습니다. 르장드르는 1782년 베를린 아카데미의 상으로 이름을 알리고 이듬해 파리 아카데미에 들어갔습니다.

이 세계는 혁명으로 한 번 끝났습니다. 1793년 국민공회는 왕정의 특권 단체라며 모든 왕립 아카데미를 없앴고, 아카데미의 중심 인물이던 화학자 라부아지에는 징세 청부인이었다는 이유로 이듬해 처형되었습니다. 1795년 국립 학사원이 그 자리를 이어받았지만, 수학의 중심은 차츰 학교와 대학으로 옮겨 갔습니다. 파리에서는 에콜 폴리테크니크가, 19세기의 독일에서는 연구하는 대학과 세미나가 새 무대가 되었고, 1826년 베를린에서 공학자 아우구스트 크렐레가 펴낸 학술지처럼 수학만 다루는 학술지가 생겼습니다. 아카데미들은 사라지지 않고 명예와 상을 주는 기관으로 남았습니다. 1812년 푸리에가 열의 전파에 관한 논문으로 받은 것도 학사원의 현상 공모 상이었습니다(푸리에 급수⁠, Fourier series⁠).

이 시대가 남긴 것은 오늘날 과학의 일상이 된 제도들입니다. 발견은 학술지에 실려야 인정받고, 먼저 출판한 사람이 우선권을 가지며, 국가나 후원자가 연구하는 사람에게 돈을 댄다는 것입니다. 풀어야 할 문제를 공개적으로 내거는 전통은 1900년 파리 국제수학자대회에서 힐베르트가 내놓은 23개의 문제 목록(강연에서는 그 가운데 10개를 소개하고, 전체는 논문으로 펴냈습니다)과 오늘날의 현상금 붙은 난제들로 이어집니다. 오일러가 굳힌 기호들, 곧 함수⁠(function)⁠의 f(x)와 오일러 공식⁠(Euler's formula)⁠의 e와 i도 이 논문집들을 통해 유럽의 공용어가 되었습니다.

이어지는 곳. 아카데미 이전, 학자들이 편지로 이어져 있던 세계는 편지 공화국에, 혁명 뒤 수학이 옮겨 간 학교는 에콜 폴리테크니크에, 19세기 대학 중심의 수학은 괴팅겐에 있습니다. 더 앞선 시대의 후원받은 학문 기관으로는 알렉산드리아 무세이온과 바그다드 지혜의 집이 있습니다. 아카데미의 봉급으로 평생을 연구한 오일러, 베를린과 파리의 아카데미를 옮겨 다닌 라그랑주, 파리와 베를린 아카데미의 외국인 회원이었던 야코프 베르누이, 파리 아카데미에서 천체역학⁠(celestial mechanics)⁠과 확률론을 쓴 라플라스의 페이지에서 이 시대의 사람들을 더 만날 수 있습니다. 돛대를 세우는 가장 좋은 방법이나 최소 작용의 원리처럼 아카데미의 현상 문제와 논쟁에서 자란 '가장 좋은 것을 찾는' 생각은 가장 좋은 것 고르기로, 풀 수 없는 달의 운동을 급수⁠(series)⁠로 조금씩 더 정확히 어림한 계산은 근사와 오차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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