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 개념 지도
인물

이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쾨니히스베르크의 철학자. 수학을 경험에 앞서면서도 새 지식을 주는 '선험적 종합 판단⁠(synthetic a priori judgment)⁠'의 본보기로 보고, 공간과 시간을 우리 직관의 형식⁠(form of intuition)⁠으로 설명해 19–20세기 수학 기초론의 출발점이 되었다.

7+5=127 + 5 = 12

이마누엘 칸트는 1724년 프로이센 왕국의 동쪽 끝 발트해의 항구 도시 쾨니히스베르크에서 마구 장인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경건주의 신앙이 깊은 집안이었고, 그는 경건주의자들이 운영하는 학교를 거쳐 1740년 고향의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평생 이 도시 근처를 거의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 도시는 오일러가 풀어 버린 일곱 다리의 무대이기도 합니다. 칸트가 자란 독일의 대학에서는 라이프니츠와 그 제자 볼프의 합리주의 철학이 주류였고, 동시에 뉴턴의 물리학이 세상을 몇 개의 수학 법칙으로 설명해 내고 있었습니다. 칸트가 평생 붙든 질문은 이렇게 요약됩니다. 수학과 물리학은 어떻게 경험하기 전부터 온 세상에 대해 반드시 참인 지식을 줄 수 있는가.

굵은 막대가 이 사람의 생애이고, 흰검은 점은 페이지 끝 연표에 적은 일들입니다. 가는 막대는 같은 시대를 산 이 위키의 인물들입니다. 나이를 끌어 보세요.

나이 세 ·

그의 출발은 자연 철학이었습니다. 대학에서 스승 크누첸에게 뉴턴을 배운 그는 1746년 첫 저서로 '살아 있는 힘'의 측정을 다루었습니다. 움직이는 물체의 힘을 질량과 속도⁠(velocity)⁠의 곱 mv로 재야 하느냐(데카르트파), 속도의 제곱을 곱한 mv2mv^2으로 재야 하느냐(라이프니츠파)는 오랜 논쟁이었는데, 파리의 달랑베르가 1743년 두 양이 각각 다른 것을 재는 옳은 양이라고 이미 정리해 둔 뒤였습니다. 오늘날의 말로 mv는 운동량⁠(momentum)⁠, 12mv2\tfrac12 mv^2은 운동 에너지입니다. 1755년의 『일반 자연사와 천체 이론』은 훨씬 대담했습니다. 그는 태양계가 천천히 돌아가는 입자들의 구름이 중력으로 뭉쳐 생겼다고 보았고, 은하수는 별들이 이루는 납작한 원반이며 망원경에 보이는 희미한 성운들은 그런 원반이 멀리 따로 있는 것이라고 추측했습니다. 이 책은 출판사가 파산해 거의 읽히지 않았지만, 1796년 라플라스가 따로 비슷한 가설을 내놓아 '칸트–라플라스 성운설⁠(nebular hypothesis)⁠'로 불리게 되었고, 성운이 다른 은하라는 추측은 1920년대 허블의 관측으로 확인되었습니다.

1755년부터 15년 동안 그는 봉급 없이 수강료로 사는 강사로서 논리학, 형이상학, 수학, 물리학, 그리고 자연지리학까지 가르쳤습니다. 이 시기의 짧은 논문 하나가 수학자들에게 특히 흥미롭습니다. 1768년 그는 오른손과 왼손을 예로 들었습니다. 두 손은 손가락의 길이도, 마디 사이의 각도도 모두 같지만 아무리 옮기고 돌려도 겹쳐지지 않습니다. 부분들 사이의 관계가 모두 같은데도 다르다면, 공간은 사물들 사이의 관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라이프니츠의 견해로는 이 차이를 설명할 수 없다고 그는 논했습니다. 오늘날의 선형대수⁠(linear algebra)⁠는 이 차이를 숫자 하나로 적습니다. 돌리기를 나타내는 변환의 행렬식⁠(determinant)⁠은 +1이고 거울에 비추는 변환의 행렬식은 −1입니다(회전 행렬⁠, rotation matrix⁠). 물체를 연속으로 움직이는 동안 행렬식도 연속으로 변하지만, 입체가 납작하게 찌그러지지 않는 한 0을 지날 수 없으므로 +1에서 −1로 건너갈 수 없습니다. 1827년 독일의 뫼비우스는 한 차원 높은 4차원 공간에서라면 3차원의 오른손을 돌려 왼손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지적했습니다.

1770년 교수가 된 칸트는 이른바 '침묵의 10년'을 보낸 뒤 1781년 『순수이성비판』을 냈습니다. 이 책의 도구가 되는 구분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판단이 경험에 기대느냐입니다. "이 방은 덥다"는 경험해 보아야 알 수 있는 후험적 판단이고, 경험 없이 참임을 아는 판단은 선험적⁠(a priori)⁠ 판단입니다. 다른 하나는 판단이 새 내용을 더하느냐입니다. "총각은 결혼하지 않은 남자다"처럼 주어의 뜻을 풀기만 하는 판단은 분석 판단⁠(analytic judgment)⁠, 주어의 뜻에 없던 것을 덧붙이는 판단은 종합 판단입니다. 분석 판단은 선험적이지만 아무것도 새로 알려 주지 않고, 종합 판단⁠(synthetic judgment)⁠은 새것을 알려 주지만 대개 경험에 기댑니다. 칸트는 수학이 그 사이의 드문 자리, 곧 경험에 앞서면서도 새 지식을 주는 '선험적 종합 판단'의 본보기라고 주장했습니다.

그가 든 예가 7+5=127 + 5 = 12입니다(위의 식). '7과 5의 합'이라는 개념을 아무리 뜯어보아도 그 속에 12라는 개념은 들어 있지 않다고 그는 말합니다. 12를 얻으려면 손가락 다섯 개나 점 다섯 개를 떠올려 7에서부터 하나씩 더해 가야 하는데, 이렇게 개념 밖으로 나가 직관의 도움을 받는 것이 종합입니다. 기하학의 예로는 "두 점 사이의 가장 짧은 선은 직선이다"를 들었습니다. '곧다'는 모양에 관한 개념이고 '가장 짧다'는 크기에 관한 개념이어서, 앞의 개념에서 뒤의 개념이 논리적으로 흘러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것이 반드시 참이라는 것을 경험을 뒤지지 않고도 압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칸트의 답은 공간과 시간이 우리 바깥의 사물이 아니라 우리가 무엇이든 경험할 때 쓰는 틀, 곧 직관의 형식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파란 안경으로 보는 사람에게 세상이 파랗게 보이는 것이 반드시 참이듯, 공간이라는 틀로만 사물을 만나는 우리에게 그 틀의 법칙인 기하학은 모든 경험에 반드시 들어맞습니다. 다만 안경은 벗을 수 있지만, 칸트의 직관의 형식은 벗고 볼 수 있는 맨눈이 따로 없다는 점이 다릅니다. 수를 세는 일은 시간 속에서 하나씩 이어 가는 일이어서 산술은 시간의 형식에 기댑니다. 그래서 수학자는 개념을 분석하는 대신 직관 속에 개념을 '구성'합니다. 삼각형의 내각의 합을 증명할 때 유클리드는 삼각형을 그리고 보조선을 그어 가며 보입니다. 칸트에게는 이 그리기가 수학을 철학과 다르게 만드는 방법 자체였습니다(공리와 공준⁠, axioms and postulates⁠). 1787년의 2판 서문에서 그는 수학이 일찍이 고대 그리스에서 확실한 학문의 길에 들어섰다고 쓰는 한편, 논리학은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한 걸음도 나아가지 않았다고 적었습니다. 반세기 뒤 조지 불과 프레게가 논리학을 대수와 기호의 체계로 바꾸면서 이 말은 뒤집혔습니다(불 대수⁠, Boolean algebra⁠).

공간에 관한 그의 주장은 곧 수학과 부딪혔습니다. 칸트에게 공간의 기하학은 유클리드의 기하학이었고, 거기에는 한 직선 밖의 한 점을 지나 그 직선과 만나지 않는 직선이 꼭 하나 있다는 평행선 공준⁠(parallel postulate)⁠도 들어 있었습니다. 칸트 자신은 두 직선으로 둘러싸인 도형이라는 개념에 논리적 모순은 없다고 인정했습니다. 그러니 공준⁠(postulate)⁠을 바꾼 기하학이 논리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은 그의 틀과 부딪히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우리 공간의 기하⁠(geometry)⁠가 선험적으로 유클리드의 것으로 정해져 있느냐였습니다. 가우스는 1817년 올베르스에게, 기하학은 산술과 달리 경험으로 확인할 문제일지 모른다고 썼습니다. 곧이어 로바쳅스키와 보여이가 평행선이 여럿인 쌍곡기하⁠(hyperbolic geometry)⁠를 발표했고, 1854년 리만은 곳마다 휜 정도가 다를 수 있는 공간의 기하를 세웠습니다(가우스 곡률⁠(Gaussian curvature)⁠, 구면기하⁠(spherical geometry)⁠). 1870년 헬름홀츠는 곡면 위에 사는 2차원 생물의 사고 실험⁠(thought experiment)⁠으로, 어떤 기하가 맞는지는 경험이 정한다고 칸트에 맞섰습니다. 그리고 1915년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general relativity)⁠은 물질 근처의 실제 공간이 휘어 있다고 말했습니다.

산술 쪽에서도 도전이 있었습니다. 프레게는 1884년 『산술의 기초⁠(basics)⁠』에서, 수를 논리의 개념만으로 정의하면 7 + 5 = 12 같은 산술의 참은 분석 판단이 된다고 칸트에 반대했습니다. 다만 그는 기하학이 선험적 종합이라는 칸트의 견해에는 동의했습니다. 이 논리주의⁠(logicism)⁠의 계획은 러셀의 역설에 부딪혔고, 20세기 초 수학이 무엇 위에 서 있는가를 두고 벌어진 수학 기초론 논쟁⁠(debate on the foundations of mathematics)⁠에서 칸트는 여러 편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네덜란드의 브라우어르는 1912년, 비유클리드 기하⁠(non-Euclidean geometry)⁠가 칸트의 공간 직관을 무너뜨렸지만 하나가 둘로 갈라지는 시간의 직관은 남는다며 그것을 수학 전체의 뿌리로 삼는 직관주의⁠(intuitionism)⁠를 내세웠습니다. 힐베르트는 1899년 『기하학의 기초』 첫머리에 모든 인간의 인식은 직관에서 시작해 개념으로, 개념에서 이념으로 나아간다는 칸트의 문장을 실었습니다. 그보다 앞서 1830년대 아일랜드의 해밀턴은 칸트를 따라 기하학이 공간의 학문이듯 대수는 순수한 시간의 학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칸트는 규칙적인 생활로 유명했습니다. 쾨니히스베르크 사람들이 그가 산책하는 것을 보고 시계를 맞추었다는 이야기가 전하지만, 뒷날의 작가들이 퍼뜨린 과장이 섞인 일화입니다. 그는 여행을 거의 하지 않았지만 수십 년 동안 자연지리학을 강의하며 먼 나라들의 지형과 풍습을 책으로 모아 가르쳤고, 손님을 불러 긴 점심을 함께하는 것을 즐겼습니다. 1790년의 『판단력 비판』, 1795년의 『영구 평화론』까지 그는 늙어서도 쉬지 않고 썼습니다. 1804년 그는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죽었고, 대성당 곁에 묻혔습니다. 도시는 제2차 세계 대전 뒤 소련의 칼리닌그라드가 되었지만 그의 무덤은 지금도 그 자리에 있습니다.

칸트는 수학자가 아니었지만, 수학자들이 자기 학문이 무엇인지 물을 때마다 그의 이름이 나옵니다. 수학의 참은 논리에서 오는가, 직관에서 오는가, 아니면 약속에서 오는가. 기하학은 세계에 관한 학문인가, 우리 마음의 틀에 관한 학문인가. 공리⁠(axiom)⁠를 약속으로 보는 푸앵카레의 규약주의⁠(conventionalism)⁠도, 모든 수학을 기호의 체계로 보는 힐베르트의 형식주의⁠(formalism)⁠도 칸트의 대답에 맞서거나 그것을 고쳐 쓰면서 자랐습니다.

이어지는 곳. 칸트의 공간과 부딪힌 기하학은 평행선 공준, 쌍곡기하, 푸앵카레 원판⁠(Poincaré disk)⁠에서, 공리에서 출발하는 수학의 모습은 공리와 공준과 불완전성 정리⁠(incompleteness theorem)⁠에서 볼 수 있습니다. 거울상과 회전⁠(rotation)⁠의 차이는 행렬식에, 그가 살던 도시의 수학은 오일러의 오일러 경로⁠(Euler path)⁠에 있습니다. 무한과 직관을 둘러싼 논쟁은 무한을 다루는 법으로 이어집니다.

관계.

가운데가 이 사람, 둘레가 이어진 인물들입니다. 선의 색은 관계의 종류(초록 스승·제자, 파랑 함께 연구, 보라 편지, 빨강 논쟁, 주황 영향)이고, 다른 인물의 페이지에 적힌 관계도 함께 모았습니다.

  • 영향을 받음 아이작 뉴턴 — 대학에서 크누첸을 통해 뉴턴의 물리학을 배웠고, 뉴턴 역학이 어떻게 필연적인 지식일 수 있는지를 묻는 데서 비판 철학이 시작되었습니다.
  • 논쟁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 — 라이프니츠–볼프 철학 속에서 자랐지만, 1768년 이후 공간을 사물들 사이의 관계로만 보는 라이프니츠의 견해에 반대했습니다.
  • 영향을 받음 레온하르트 오일러 — 1768년의 공간 논문에서 절대 공간을 옹호한 오일러의 1748년 베를린 아카데미 논문을 언급하며, 같은 결론을 기하학의 사실로 뒷받침하려 했습니다.
  • 논쟁 조지 버클리 — 자신의 관념론이 사물의 존재를 지각으로 환원한 버클리의 관념론과 다르다는 것을 『형이상학 서설』과 『순수이성비판』 2판에서 거듭 강조했습니다.
  • 영향을 받음 아리스토텔레스 — 1787년, 논리학은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한 걸음도 나아가거나 물러서지 않은 완결된 학문이라고 썼습니다.
  • 영향을 줌 윌리엄 로언 해밀턴 — 칸트를 열심히 읽은 해밀턴은 기하학이 공간의 학문이듯 대수는 '순수한 시간의 학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 영향을 줌 L. E. J. 브라우어르 — 브라우어르는 1912년 교수 취임 강연에서 칸트의 공간 직관은 버리되 시간 직관은 수학의 뿌리로 지킨다며 직관주의를 선언했습니다.
  • 영향을 줌 다비트 힐베르트 — 힐베르트는 1899년 『기하학의 기초』 첫머리에 모든 인간의 인식은 직관에서 시작해 개념을 거쳐 이념으로 끝난다는 『순수이성비판』의 문장을 실었습니다.

연표.

  • 1740년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에 들어가 크누첸에게서 뉴턴의 물리학을 배우다
  • 1746년 '살아 있는 힘'의 참된 측정에 관한 첫 저서를 마치다
  • 1755년 『일반 자연사와 천체 이론』에서 태양계가 돌아가는 구름에서 생겼다고 논하고, 대학 강사가 되다
  • 1756년 이 무렵부터 수십 년 동안 자연지리학을 강의하다
  • 1768년 오른손과 왼손처럼 겹쳐지지 않는 쌍으로 공간의 본성을 따지다
  • 1770년 논리학과 형이상학 교수가 되다
  • 1781년 『순수이성비판』을 내다
  • 1783년 『형이상학 서설』을 내다
  • 1787년 『순수이성비판』 2판을 내다
  • 1790년 『판단력 비판』을 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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