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리아 무세이온(Mouseion of Alexandria)
기원전 300년 무렵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알렉산드리아 궁정 안에 세운 학자들의 공동체와 도서관. 유클리드와 에라토스테네스에서 프톨레마이오스, 테온과 히파티아까지 700년 동안 그리스 수학의 중심이었고, 한 번의 불이 아니라 긴 쇠퇴 끝에 사라졌다.
기원전 331년 알렉산드로스는 나일강 삼각주 서쪽 끝, 바다와 마레오티스 호수 사이의 좁은 땅에 새 도시를 세웠습니다. 기원전 323년 그가 바빌론에서 죽자 제국은 장군들에게 쪼개졌고, 이집트를 차지한 프톨레마이오스는 알렉산드리아를 수도로 삼아 300년 가까이 이어질 왕조를 열었습니다. 그리스어를 쓰는 소수(prime number)의 지배층이 이집트의 오랜 농경 사회 위에 올라선 나라였습니다. 나일강의 곡물에서 나오는 막대한 부를 쥔 왕들은 다른 후계 왕국들과 겨루며 자신들이 그리스 문화의 정통 계승자임을 보여 주고 싶어 했습니다. 기원전 300년 무렵 궁정 구역 안에 세워진 무세이온(무사 여신들의 전당)과 그 곁의 도서관은 그 야심의 산물이었고, 이후 700년 동안 그리스 수학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왕의 돈으로 사는 학자들. 기원전 1세기 말 이 도시를 찾은 지리학자 스트라본은 무세이온을 궁전의 일부로 묘사했습니다. 산책로와 앉을 자리가 놓인 회랑, 학자들이 함께 식사하는 큰 건물이 있었고, 왕이 임명한 사제가 공동체를 이끌었다고 합니다. 회원들은 봉급과 식사를 받았고 세금도 면제받았습니다. 반드시 학생을 가르쳐야 하는 것도 아니어서, 오늘날의 대학보다는 연구소에 가까운 곳이었습니다. 설립 과정에서는 아테네에서 망명해 온 아리스토텔레스 학파의 정치가 팔레론의 데메트리오스가 조언했다고 전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제자들이 아테네의 리케이온에서 자료를 모으고 분류하며 연구하던 방식이 왕실의 재정을 얻어 훨씬 큰 규모로 옮겨진 셈입니다. 모두가 감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풍자 시인 플레이우스의 티몬은 왕의 먹이를 받으며 '무사 여신들의 새장' 안에서 끝없이 다투는 글쟁이들이라고 이들을 비꼬았습니다.
모든 책을 모으다. 도서관의 목표는 알려진 모든 책을 모으는 것이었습니다. 이집트는 글쓰기 재료인 파피루스의 산지였으니, 책을 만드는 원료를 왕국이 쥐고 있던 셈입니다. 2세기의 의사 갈레노스는 알렉산드리아 항구에 들어온 배에서 책을 거두어 베낀 뒤 사본을 돌려주었고, 아테네에서는 3대 비극 작가의 공식 사본을 막대한 보증금을 걸고 빌려 와 원본을 돌려주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두루마리가 40만 권이니 70만 권이니 하는 고대의 숫자들은 믿기 어렵지만, 지중해 세계에서 견줄 곳이 없는 장서였던 것은 분명합니다. 시인 칼리마코스는 저자와 분야별로 책을 정리한 목록 『피나케스』를 만들었고, 사서들은 호메로스의 여러 사본을 대조해 원문을 되살렸습니다. 흩어진 사본을 모아 비교하고 하나의 체계로 엮는 이 문화에서 수학의 가장 유명한 편찬물이 나왔습니다. 경쟁 왕국 페르가몬이 파피루스 수입이 막히자 양피지를 발전시켰다는 이야기는 로마의 플리니우스가 전하는 전설입니다.
유클리드와 첫 세대. 유클리드는 기원전 300년 앞뒤로 알렉산드리아에서 가르쳤습니다. 그의 『원론』 13권은 비례론(theory of proportion)의 에우독소스, 정다면체(regular polyhedron)를 연구한 테아이테토스 같은 앞 세대가 아테네에서 얻은 결과를, 몇 개의 정의와 공준(postulate)에서 출발해 하나씩 증명해 나가는 한 줄의 사슬로 엮었습니다. 공준은 '두 점을 잇는 직선을 그을 수 있다'처럼 증명 없이 받아들이는 출발점입니다(공리와 공준(axioms and postulates)). 피타고라스 정리(Pythagorean theorem), 두 수의 최대공약수(greatest common divisor)를 구하는 유클리드 호제법(Euclidean algorithm), 소수가 끝없이 많다는 증명, 길이의 비로 다룬 무리수(irrational number)가 모두 이 책에 있습니다. 다른 공준들과 달리 길고 어색한 다섯째 공준, 곧 평행선 공준(parallel postulate)은 2,000년 동안 수학자들을 괴롭혔습니다. 한 세대 뒤 페르게 출신의 아폴로니오스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유클리드의 제자들과 함께 공부했다고 전하며, 원뿔을 평면으로 잘라 생기는 곡선들(원뿔곡선, conic section)을 다룬 『원뿔곡선론』에서 타원(ellipse), 포물선(parabola), 쌍곡선(hyperbola)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평면을 조금 기울이면 타원, 원뿔의 옆선과 나란하게 자르면 포물선, 더 세우면 쌍곡선이 나옵니다.
편지로 이어진 시라쿠사. 시칠리아의 시라쿠사에 살던 아르키메데스에게 알렉산드리아는 결과를 보내 평가받는 곳이었습니다. 그는 새 정리를 먼저 알렉산드리아의 천문학자 코논에게, 코논이 죽은 뒤에는 그 제자 도시테오스에게 보냈습니다. 『나선에 관하여』의 머리말에서는, 남의 결과를 제 것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을 가려내려고 앞서 보낸 목록에 틀린 정리 두 개를 일부러 섞어 두었다고 밝혔습니다. 도형을 얇은 조각으로 잘라 저울에 달아 보는 방식으로 넓이(area)와 부피를 먼저 짐작하고 나중에 엄밀하게 증명했다는 비밀을 털어놓은 『방법』은 에라토스테네스에게 보낸 글입니다. 조각을 더해 넓이를 구하는 이 생각은 리만 합(Riemann sum)과 적분(integral)의 먼 조상입니다. 도시와 도시를 잇는 이런 편지의 연결망은 거의 1,900년 뒤 편지 공화국에서 다시 나타납니다.
지구를 잰 도서관장. 키레네 출신의 에라토스테네스는 기원전 245년 무렵 프톨레마이오스 3세의 부름을 받아 도서관을 맡았습니다. 원정대와 상인, 측량사가 적어 온 거리와 여정이 쌓이는 곳에서 그는 세계 지도를 그리려 했고, 그러려면 지구의 크기부터 알아야 했습니다. 하짓날 정오에 남쪽의 시에네에서는 해가 머리 바로 위에 있는데, 알렉산드리아에서는 햇빛이 수직에서 원의 50분의 1(7.2도)만큼 기울어 들어옵니다. 그는 여기서 지구 둘레를 두 도시 사이 거리(5,000스타디온(stadion))의 50배인 25만 스타디온으로 얻었습니다. 햇빛은 나란히 들어오니 그 기울기(slope)가 곧 두 도시가 지구 중심에서 벌어진 각이고, 원에서 호의 길이는 중심각(central angle)에 비례하므로 각이 전체의 50분의 1이면 거리도 둘레의 50분의 1입니다(단위원과 라디안(unit circle and radian), 측지선(geodesic)). 이 논증은 시에네가 알렉산드리아의 정남쪽에 있다고 놓는데, 실제로는 동쪽으로 3도쯤 비껴 있습니다. 그의 책은 사라졌고, 이 계산은 수백 년 뒤 천문학자 클레오메데스의 요약으로 전합니다. 1스타디온이 몇 미터였는지 확실하지 않아 이 값이 얼마나 정확했는지는 논란이지만, 짧은 스타디온(약 157미터)으로 치면 약 3만 9천 킬로미터로 실제 둘레 4만 킬로미터에 가깝습니다. 2, 3, 5, …의 배수(multiple)를 차례로 지워 소수만 남기는 '에라토스테네스의 체(sieve of Eratosthenes)'에도 그의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여러 분야에서 모두 두 번째로 뛰어나다는 뜻으로 '베타'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전하는데, 한 사람이 문헌학과 지리학, 수학, 연대학을 넘나들 수 있었던 것 자체가 이 도서관이 만든 조건이었습니다.
첫 균열. 왕실의 후원은 왕실의 정치에 묶여 있었습니다. 기원전 145년 왕위를 차지한 프톨레마이오스 8세는 반대파로 몰린 지식인들을 도시에서 내쫓았고, 호메로스 연구로 이름난 도서관장 사모트라케의 아리스타르코스도 키프로스로 떠났습니다. 후대의 아테나이오스는 그 덕분에 섬과 도시들이 문법학자, 철학자, 기하학자, 음악가, 의사들로 가득 찼다고 비꼬듯 적었습니다. 학자들이 흩어지자 로도스와 페르가몬 같은 도시들이 새 무대로 떠올랐습니다. 기원전 48년 카이사르가 알렉산드리아에서 포위되었을 때 항구 쪽에 불이 번졌고, 1세기의 세네카는 이때 책 4만 권이 탔다고 적었습니다. 불탄 것이 도서관 본체인지 항구 창고에 쌓인 책인지는 기록마다 다릅니다. 기원전 30년 이집트가 로마의 속주가 된 뒤에도 무세이온은 이어졌지만, 이제 회원을 임명하는 사람은 로마 황제였습니다.
로마 시대의 수학. 로마의 지배 아래에서도 알렉산드리아는 수학의 도시였습니다. 다음 사람들이 모두 무세이온의 회원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모두 이 도시에서 일했습니다. 1세기의 헤론은 기계와 측량을 다루며 세 변의 길이만으로 삼각형의 넓이를 구하는 공식(헤론의 공식, Heron's formula)을 남겼고, 2세기의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왕조의 왕들과 이름만 같습니다)는 『알마게스트』에서 현의 표(chord table)를 만들어 행성의 위치를 계산했습니다. 현은 원 위의 두 점을 잇는 선분이고, 그는 중심각을 반 도씩 늘려 가며 그 현의 길이를 적었습니다. 인도의 천문학자들은 현 대신 현의 절반을 적었고, 이 반현(half-chord)의 표가 바그다드를 거쳐 오늘의 사인(sine) 표가 됩니다. 중심각
끝, 그리고 전설. 도서관의 끝은 한 번의 불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270년대 아우렐리아누스 황제가 팔미라의 제노비아 세력에게서 알렉산드리아를 되찾는 싸움에서 궁정 구역(브루키온)이 크게 부서졌고, 무세이온의 건물도 이 무렵 사라졌을 가능성이 큽니다. 다만 한 세기 뒤의 테온이 '무세이온 사람'으로 불린 것을 보면, 그 이름과 제도는 다른 자리에서 한동안 이어졌던 듯합니다. 391년에는 테오필로스 주교가 이끄는 기독교도들이 이교 신전 세라페움을 허물었는데, 그 안의 '딸 도서관'에 책이 얼마나 남아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415년에는 테온의 딸 히파티아가 폭도에게 살해되었습니다. 그녀는 플라톤의 철학을 이어받은 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 철학을 가르치고 디오판토스, 아폴로니오스, 프톨레마이오스의 책에 주석을 달았다고 전하며, 총독 오레스테스와 주교 키릴로스의 권력 다툼 한가운데서 희생되었습니다. 그녀가 도서관의 마지막 사서였다는 이야기는 근대의 각색입니다. 641년 아랍군이 도시를 점령했을 때 칼리프 우마르가 책을 불태우라 명했다는 이야기도 수백 년 뒤인 13세기 문헌에 처음 나타나, 대부분의 역사가가 전설로 봅니다. 파피루스 두루마리는 세월이 지나면 삭아서 다시 베껴야 했으니, 후원과 사람이 끊긴 도서관은 불이 없어도 서서히 사라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엇이 남았나. 책은 사본이 되어 흩어졌습니다. 그리스어 사본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거듭 베껴지며 살아남았고, 9세기에는 바그다드에서 『원론』과 『알마게스트』가 아랍어로 옮겨졌으며, 12세기에는 그 아랍어본이 다시 라틴어로 옮겨졌습니다. 1607년 베이징에서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와 명의 학자 서광계가 한문으로 옮긴 『원론』 앞 여섯 권, 곧 『기하원본』은 조선의 학자들에게까지 닿았습니다. 알렉산드리아가 남긴 또 하나의 유산은 제도의 모형입니다. 권력자가 돈을 대고, 학자들이 도서관을 곁에 두고 모여 지내며 연구하는 공동체라는 생각은 바그다드의 지혜의 집, 17세기의 과학 아카데미, 20세기의 고등연구소까지 모습을 바꾸며 이어졌습니다. 후원자의 정치에 운명을 맡긴 학문이 얼마나 쉽게 흩어지는지를 처음 보여 준 곳도 여기였습니다.
이어지는 곳. 『원론』에 실린 증명들은 피타고라스 정리, 유클리드 호제법, 소수에서 하나씩 볼 수 있고, 다섯째 공준의 긴 뒷이야기는 그것을 증명하려던 2,000년의 시도를 다룬 평행선 공준과, 그것을 버려도 모순 없는 기하(geometry)가 생긴다는 쌍곡기하(hyperbolic geometry)에서 이어집니다. 도형을 얇은 조각으로 잘라 더하는 아르키메데스의 방법은 그 조각을 한없이 얇게 하는 정적분(definite integral)과, 끝없는 과정을 유한한 논증으로 다루는 무한을 다루는 법, 참값을 위아래에서 조여 가는 근사와 오차로 이어지고, 둥근 지구 위의 거리를 각으로 잰 에라토스테네스의 논증은 지구 위 두 점 사이의 거리를 구하는 하버사인 공식(haversine formula)으로 이어집니다. 이곳의 책들이 다음에 머문 곳은 바그다드 지혜의 집이고, 이 도시를 거쳐 간 사람들은 유클리드, 아르키메데스, 에라토스테네스의 페이지에서 더 자세히 만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