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른스트 쿰머(Ernst Eduard Kummer)
원분 정수(cyclotomic integer)에서 소인수분해(prime factorization)가 한 가지로 정해지지 않음을 알아차리고 '이상 복소수(ideal complex number)'로 되살려,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Fermat's Last Theorem)를 정규 소수(regular prime) 지수에 대해 증명하고 대수적 정수론(algebraic number theory)의 길을 연 독일의 수학자.
에른스트 에두아르트 쿰머는 1810년 지금의 폴란드 서부 자리(당시 이름 조라우)에서 의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가 연구를 시작한 1830년대, 정수론(number theory)은 가우스의 『산술 연구』(1801)가 세운 틀 안에 있었고, 수학자들은 페르마가 남긴 마지막 정리, 곧 n이 3 이상이면
나이
그는 1828년 할레 대학에 신학을 공부하러 들어갔다가 수학으로 옮겨 1831년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 뒤 10년 동안 리그니츠(지금의 레그니차)의 김나지움에서 가르쳤는데, 학생 가운데 뒷날 베를린에서 그의 동료가 되는 레오폴트 크로네커가 있었습니다. 교사로 있으면서 쓴 1836년의 초기하급수 논문이 야코비와 디리클레의 눈에 띄었고, 1842년 브레슬라우 대학의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의 대표적인 업적은 「틀린 증명이 만든 수학」 2–3절이 따라가는 이야기입니다. 페르마의 식을 1의 거듭제곱근(roots of unity)
쿰머는 깨진 것을 받아들이는 대신 빠진 것을 채웠습니다. 두 분해가 어긋나는 자리에 들어가야 할 '최대공약수(greatest common divisor)'가 그 세계에 없다면, 그것을 가상의 인수, 곧 '이상 복소수'로 덧붙이자는 것입니다. 이 인수들까지 넣으면 분해가 다시 한 가지로 정해집니다. 1847년 3월 파리 아카데미에서 라메가 페르마의 정리를 증명했다고 발표하고 리우빌이 그 증명이 유일 인수분해에 기대고 있음을 지적한 뒤, 5월에 리우빌이 아카데미에서 읽은 쿰머의 편지가 이 사실들을 알렸습니다. 같은 해 쿰머는 소수(prime number) p가 제 원분 정수의 '유수'(분해가 얼마나 깨졌는지를 재는 수)를 나누지 않으면 페르마의 정리가 그 지수에서 성립함을 증명했습니다. 이런 소수를 정규 소수라 하고, 100보다 작은 소수 가운데 정규가 아닌 것은 37, 59, 67뿐입니다. 페르마의 정리에 상을 건 파리 아카데미는 풀이가 들어오지 않자 1857년 응모하지도 않은 쿰머에게 상을 주었습니다.
1855년 디리클레가 가우스의 뒤를 이으러 괴팅겐으로 떠나자 쿰머는 그의 베를린 자리를 이었습니다. 베를린에서 그는 바이어슈트라스와 함께 1861년 순수 수학 세미나를 열었고, 크로네커와 함께 베를린을 19세기 후반 독일 수학의 중심으로 만들었습니다. 그의 강의는 명료하기로 이름이 났고, 칸토어가 1867년 그와 바이어슈트라스의 지도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정수론 밖에서는 마디점(곡면이 뾰족하게 모이는 점)이 16개인 4차 곡면, 곧 쿰머 곡면(Kummer surface)을 연구했고, 육군 사관학교에서 탄도학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1883년 은퇴했고 1893년 베를린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쿰머의 가상의 인수는 오래 가상으로 남지 않았습니다. 1871년 데데킨트는 그것을 '두 수의 배수(multiple)들의 합을 모두 모은 집합(set)', 곧 아이디얼(ideal)로 정의해, 아이디얼이 소 아이디얼(prime ideal)들의 곱으로 한 가지로만 쪼개진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이 언어는 에미 뇌터의 추상대수학과 20세기의 대수기하학으로 퍼졌고, 1994년 페르마의 정리를 끝내 증명한 와일스의 도구 상자도 쿰머에서 시작된 대수적 정수론 위에 서 있습니다. 쿰머가 1840년대 초 페르마의 정리를 증명했다며 디리클레에게 원고를 보냈다가 같은 빈틈을 지적받았다는 이야기가 널리 전하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당대의 기록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이어지는 곳. 깨졌다가 되살아나는 인수분해의 자세한 모습은 유일 인수분해와 아이디얼에, 그 바탕인 유클리드 호제법(Euclidean algorithm)과 소인수분해는 각 페이지에 있습니다. 라메의 발표에서 쿰머의 편지, 데데킨트의 아이디얼까지의 흐름은 「틀린 증명이 만든 수학」이, 정수의 분해가 하나뿐이라는 사실이 소수의 분포를 세는 데 어떻게 쓰이는지는 「소수를 세는 사람들」이 따라갑니다.
관계.
- 함께 연구 페터 구스타프 르죈 디리클레 — 디리클레의 해석적 정수론(analytic number theory)과 쿰머의 원분 정수 연구는 같은 시기 베를린과 브레슬라우에서 함께 자랐고, 1855년 디리클레가 괴팅겐으로 떠나자 쿰머가 그의 베를린 자리를 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멘델스존 집안의 사촌 자매와 결혼해 친척이기도 했습니다.
- 편지 카를 구스타프 야코프 야코비 — 1836년 초기하급수 논문을 계기로 야코비와 편지를 주고받았고, 1842년 브레슬라우 교수 자리에는 야코비와 디리클레의 추천이 힘이 되었습니다.
- 함께 연구 카를 바이어슈트라스 — 1861년 베를린 대학에 독일에서 처음으로 꼽히는 순수 수학 세미나를 함께 열었고, 두 사람과 크로네커가 이끈 베를린은 19세기 후반 수학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 영향을 줌 리하르트 데데킨트 — 데데킨트는 쿰머의 '이상 복소수'를 수의 모임인 아이디얼로 바꾸어 정의했습니다. 쿰머가 가상의 인수로 채운 자리를 실제로 존재하는 대상으로 채운 것입니다.
- 제자 게오르크 칸토어 — 칸토어는 1867년 베를린 대학에서 쿰머와 바이어슈트라스의 지도로 정수론에 관한 논문을 써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연표.
- 1828년 할레 대학에 신학을 공부하러 들어갔다가 수학으로 옮기다
- 1831년 할레에서 박사 학위를 받다
- 1832년 리그니츠의 김나지움에서 가르치기 시작하다. 학생 가운데 크로네커가 있었다
- 1836년 초기하급수에 관한 논문을 크렐레의 저널에 싣다
- 1842년 브레슬라우 대학 교수가 되다
- 1844년 원분 정수에서 유일 인수분해가 깨질 수 있음을 보이다
- 1846년 '이상 복소수'로 인수분해를 되살리다
- 1847년 파리 아카데미에서 읽힌 편지로 라메의 증명에 빈틈이 있음을 알리고, 정규 소수에 대해 페르마의 정리를 증명하다
- 1855년 디리클레의 뒤를 이어 베를린 대학 교수가 되다
- 1857년 응모하지 않은 파리 아카데미의 상을 받다
- 1861년 바이어슈트라스와 함께 베를린 대학의 수학 세미나를 열다
- 1864년 마디점이 16개인 4차 곡면, 곧 쿰머 곡면을 연구하다
- 1883년 은퇴하다
이 인물이 나오는 긴 글
이 인물을 언급하는 페이지
- 정수론
… - \sqrt{-5}) 처럼 더 쪼갤 수 없는 수로의 분해가 두 가지나 됩니다. 1840년대 독일의에른스트 쿰머는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공격하다 이 문제에 부딪혀 '이상수'를 도입했고, 데데킨트는 1871년 이를 …
- 유일 인수분해와 아이디얼
… + y^p = \prod_k (x + \zeta^k y) 로 쪼갠 뒤 정수처럼 추론했는데, 브레슬라우의에른스트 쿰머는 이미 1844년에 이런 원분 정수에서 유일 인수분해가 깨질 수 있음을 보였습니다. 처음 깨지는 것은 p …
-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 그 논증은 이렇게 넓힌 수의 세계에서도 소인수분해가 한 가지뿐이라는 가정에 기대고 있었습니다. 독일의에른스트 쿰머는 그 가정이 p = 23에서 처음 깨진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고, '이상수'라는 가상의 인수를 덧붙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