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 개념 지도
시대와 장소(Times and places)

혁명기 파리와 에콜 폴리테크니크(Revolutionary Paris and the École Polytechnique)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시대의 파리. 전쟁과 공공사업에 필요한 기술자를 기르려고 1794년 세운 에콜 폴리테크니크에서 라그랑주, 라플라스, 몽주, 푸리에, 코시가 가르치고 배웠고, 미터법과 해석학⁠(mathematical analysis)⁠의 엄밀화와 열의 수학이 여기서 나왔다.

1789년의 혁명은 수학을 국가의 일로 만들었습니다. 왕정의 특권 기관들이 문을 닫는 동안, 유럽의 왕국들과 전쟁을 치르던 공화국에는 대포를 쏘고 요새를 쌓고 도로와 다리를 놓을 기술자가 급했습니다. 1794년 파리에 세워진 에콜 폴리테크니크는 그 필요에서 태어난 학교입니다. 태생이 아니라 시험 성적으로 학생을 뽑고, 당대 최고의 수학자들이 해석학과 기하⁠(geometry)⁠를 가르쳤습니다. 이 학교의 강의실에서 극한⁠(limit)⁠으로 미적분⁠(calculus)⁠을 다시 세운 교과서가 나왔고, 졸업생들은 수학을 기계와 열과 빛의 언어로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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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이 수학자들에게 처음 맡긴 일은 단위였습니다. 구체제 프랑스에는 지방마다 다른 길이와 무게의 단위가 수백 가지 있었고, 이것은 상인과 농민의 오랜 불만이었습니다. 1791년 과학 아카데미의 위원회는 북극에서 적도까지 자오선⁠(meridian)⁠ 길이의 천만분의 일을 새 길이 단위 미터로 삼기로 했습니다. 위원 가운데에는 라그랑주, 라플라스, 기하학자 가스파르 몽주, 철학자이자 수학자 콩도르세가 있었습니다. 천문학자 들랑브르와 메생은 1792년부터 1798년까지 전쟁 중의 프랑스와 스페인을 가로질러 됭케르크에서 바르셀로나까지 삼각측량⁠(triangulation)⁠을 했고, 메생은 바르셀로나에서 잰 위도의 작은 어긋남을 평생 괴로워하며 숨겼습니다. 1805년 르장드르가 최소제곱법⁠(method of least squares)⁠, 곧 여러 관측값과 식이 주는 값의 차이를 제곱해 더한 합이 가장 작아지도록 식을 고르는 방법을 처음 발표하며 든 예제가 바로 이 자오선 자료였습니다(최소제곱 회귀⁠(least-squares regression)⁠, 정사영⁠(orthogonal projection)⁠). 모든 것을 십진법으로 맞추려는 열정은 각도를 100등분하는 단위와 하루를 10시간으로 나누는 시계까지 낳았지만, 시계는 몇 해 만에 버려졌습니다(자리값 기수법).

새 단위는 새 수표를 요구했습니다. 토지 대장을 새 각도 단위로 다시 만들려면 로그와 삼각함수⁠(trigonometric function)⁠의 표를 전부 다시 계산해야 했고, 이 일을 맡은 공학자 가스파르 드 프로니는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묘사한 핀 공장의 분업을 계산에 들였습니다. 맨 위의 몇몇 수학자가 공식을 고르고, 가운데 층이 그것을 덧셈만으로 계산할 수 있는 차분⁠(finite difference)⁠의 절차로 바꾸면, 맨 아래의 수십 명은 덧셈과 뺄셈만 했습니다. 차분의 절차란 이웃한 값들의 차이를 이용하는 방법입니다. 제곱수⁠(perfect square)⁠ 1, 4, 9, 16, …의 차이는 3, 5, 7, …이고 그 차이의 차이는 늘 2이니, 2를 더해 가기만 하면 다음 제곱수가 계속 나옵니다. 다항식⁠(polynomial)⁠이라면 몇 번 차이를 내면 늘 상수가 되므로 이렇게 덧셈만으로 표 전체를 채울 수 있습니다. 혁명으로 일자리를 잃은 가발 미용사들이 많았다는 이야기가 전합니다. 계산을 기계적인 단계로 쪼개는 이 방식은 뒤에 영국의 찰스 배비지가 이 덧셈을 톱니바퀴로 하는 차분 기관⁠(difference engine)⁠을 구상하는 실마리가 되었습니다(알고리즘⁠(algorithm)⁠).

에콜 폴리테크니크는 1794년 '중앙 공공사업 학교'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어 이듬해 지금의 이름을 얻었습니다. 설계자는 기하학자 몽주와, 공화국의 군사를 맡은 수학자 라자르 카르노였습니다. 전국 시험으로 뽑힌 열여섯에서 스무 살의 학생들은 처음 몇 해 동안 급여까지 받으며 공통 과정에서 해석학, 역학, 화법기하학⁠(descriptive geometry)⁠을 배운 뒤 토목, 광산, 공병, 포병 같은 응용 학교로 나뉘었습니다. 몽주의 화법기하학은 입체를 평면도와 입면도 두 장으로 정확히 옮기는 방법으로, 그가 메지에르의 공병학교에서 요새 설계를 가르치던 시절에는 군사 기밀로 다뤄졌습니다. 그 몽주가 1781년 흙을 파서 옮기는 비용을 가장 작게 하는 문제를 낸 사람입니다(최적 수송⁠(optimal transport)⁠). 같은 무렵 잠시 문을 연 사범학교에서는 라그랑주와 라플라스와 몽주의 강의를 속기사들이 받아 적어 출판했는데, 그 청중 가운데 스물여섯 살의 푸리에가 있었습니다.

교수진은 혁명 이전의 아카데미가 기른 거장들이었습니다. 라그랑주는 이 학교의 첫 해석학 교수로서, 1797년 『해석함수론』에서 무한소⁠(infinitesimal)⁠ 대신 테일러 급수⁠(Taylor series)⁠를 미적분의 기초⁠(basics)⁠로 삼으려 했고, 거기서 도함수⁠(derivative function)⁠의 기호 f′(x)f'(x)가 나왔습니다. 1788년 『해석역학⁠(analytical mechanics)⁠』의 라그랑주 승수⁠(Lagrange multiplier)⁠는 제약이 있는 최적화⁠(optimization)⁠의 표준 도구가 되었습니다. '둘레가 12인 직사각형 가운데 넓이⁠(area)⁠가 가장 큰 것'처럼 조건이 붙은 문제에 보조 변수 하나를 더해 조건 없는 문제로 바꾸는 방법입니다. 혁명 전 포병 장교 후보의 시험관으로 젊은 보나파르트를 시험했던 라플라스는 『천체역학』(1799–1825)과 확률론을 썼고, 서로 독립⁠(independence)⁠인 작은 오차들이 많이 더해지면 그 합의 분포가 종 모양에 가까워진다는 그의 중심극한정리⁠(central limit theorem)⁠와, 관측 결과에서 원인의 확률⁠(probability)⁠을 거꾸로 따지는 역확률⁠(inverse probability)⁠은 측정 오차를 다루는 공학자들의 무기가 되었습니다. 르장드르의 『기하학 원론』(1794)은 한 세기 동안 교과서로 쓰였습니다. 학교는 1795년부터 자체 학술지를 냈고, 교수의 강의는 곧 교과서로 인쇄되어 프랑스 밖으로 퍼졌습니다.

나폴레옹은 이 학교와 학자들을 자기 권력의 일부로 삼았습니다. 그는 1797년 학사원의 역학 분과 회원으로 뽑힌 것을 자랑스러워했고, 1798년 이집트 원정에 150명이 넘는 학자와 기술자를 데려갔습니다. 몽주와 화학자 베르톨레, 그리고 푸리에가 그 안에 있었고, 폴리테크니크의 젊은 졸업생들이 측량과 지도 제작을 맡았습니다. 카이로에 세운 이집트 학사원에서 몽주가 원장, 푸리에가 서기를 맡았고, 원정대가 찾은 로제타석과 스무 권이 넘는 『이집트 지』가 이 원정의 학문적 유산입니다. 1804년 나폴레옹은 학교를 군사 학교로 바꾸어 학생들에게 제복을 입히고 병영에서 지내게 했으며, 이듬해부터 학비를 받게 해 가난한 수재에게 열려 있던 문을 좁혔습니다.

이 학교의 수학은 공학의 물음에서 자랐습니다. 푸리에는 이제르 도의 지사로 일하며 금속 막대 속 열이 어떻게 퍼지는지를 연구해 1807년 열방정식⁠(heat equation)⁠과 삼각급수⁠(trigonometric series)⁠의 논문을 냈고, 라그랑주를 비롯한 심사위원들이 그 엄밀함을 의심해 발표가 늦어진 끝에 1822년 『열의 해석적 이론』을 냈습니다(푸리에 급수⁠(Fourier series)⁠, 정사영). 라자르 카르노의 아들인 졸업생 사디 카르노는 1824년 증기기관의 효율에 한계가 있음을 보이는 책을 써서 열역학의 문을 열었고, 졸업생이자 교수 푸아송은 시행을 많이 되풀이하면 결과의 비율이 확률에 다가간다는 정리에 '큰 수의 법칙⁠(law of large numbers)⁠'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큰 수의 법칙). 여성은 입학할 수 없었습니다. 수학자 소피 제르맹은 이 학교의 강의 노트를 구해 공부하고 남자 이름으로 라그랑주에게 과제를 보냈으며, 뒤에 같은 가명으로 가우스와 편지를 주고받았고, 1816년 탄성판의 진동에 관한 연구로 학사원의 상을 받았습니다.

1805년에 입학한 코시는 이 학교가 기른 수학자의 전형입니다. 토목 기사로 셰르부르 군항 공사에서 일하다 파리로 돌아온 그는, 1816년 왕정복고 정부가 공화파인 몽주를 학사원에서 내쫓자 그 자리를 받았습니다. 같은 해 학교는 나폴레옹 지지자가 많다는 이유로 잠시 문을 닫았다가 다시 꾸려졌습니다. 그가 폴리테크니크 학생들을 위해 쓴 1821년의 『해석학 강의』는 극한 하나로 연속성⁠(continuity)⁠을 정의하고 중간값 정리⁠(intermediate value theorem)⁠를 증명했습니다. 1823년의 『미분적분학 강의 요약』은 같은 극한으로 미분계수⁠(derivative)⁠와 정적분⁠(definite integral)⁠을 정의하고, 연속함수에 대해 미적분의 기본정리⁠(fundamental theorem of calculus)⁠를 증명했습니다. 학교 운영진은 장래의 기술자에게 너무 이론적이라며 불평했지만, 이 강의들이 오늘날 해석학 교과서의 틀이 되었습니다. 그는 복소평면⁠(complex plane)⁠의 적분⁠(integral)⁠과 극의 이론, 행렬식⁠(determinant)⁠과 대칭 행렬⁠(symmetric matrix)⁠의 고유값⁠(eigenvalue)⁠에서도 새 길을 열었습니다.

파리는 외국의 젊은이들을 끌어들였습니다. 1822년 열일곱 살에 온 디리클레는 푸리에의 곁에서 배운 뒤 베를린으로 가서, 1829년 푸리에 급수가 수렴⁠(convergence)⁠하는 조건을 증명하며 오늘날의 함수⁠(function)⁠ 개념을 다듬었습니다. 노르웨이의 아벨은 1826년 파리 학사원에 대작을 냈지만 심사를 맡은 코시가 원고를 묵혀 두었습니다. 파리의 젊은 갈루아는 1828년과 1829년 두 번 이 학교의 입학시험에 떨어졌습니다. 그는 방정식의 근들을 서로 뒤섞는 순열⁠(permutation)⁠들이 이루는 구조, 오늘날 군이라 부르는 것을 보고 방정식의 근을 사칙연산과 거듭제곱근만으로 적을 수 있는지를 판정하는 법을 찾았고, 그래서 일반적인 5차 방정식에는 그런 근의 공식⁠(quadratic formula)⁠이 없는 까닭을 밝혀 놓고도 1832년 스무 살에 결투로 죽었습니다. 그의 원고는 1846년 폴리테크니크 출신의 수학자 조제프 리우빌이 자기 학술지에 실어 세상에 알렸습니다.

1830년 7월 혁명과 함께 한 시대가 저물었습니다. 새 왕에게 충성 서약을 거부한 코시는 망명길에 올랐고, 같은 해 푸리에가 죽었습니다. 연구의 중심은 차츰 크렐레의 학술지(1826)와 베를린, 괴팅겐의 독일 대학들로 옮겨 갔습니다. 그러나 학교의 모형은 퍼져 나갔습니다. 미국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는 1817년부터 프랑스식 교과 과정과 교과서를 들였고, 독일어권의 카를스루에와 취리히에 세워진 공과 학교들도 폴리테크니크를 본떴습니다. 수학을 공학의 공용어로 가르치고, 경쟁 시험으로 엘리트를 뽑고, 교과서로 지식을 표준화⁠(standardization)⁠하는 방식이 이 학교에서 굳었습니다.

이어지는 곳. 혁명 이전 이 학자들을 길러 낸 기관은 왕립학회와 과학 아카데미에, 파리의 해석학을 이어받아 엄밀한 수학의 중심이 된 곳은 괴팅겐에 있습니다. 푸리에의 열방정식은 해저 케이블 신호의 수학이 되어 전신과 해저 케이블의 시대로 이어지고, 신호를 진동수⁠(frequency)⁠로 쪼개는 생각은 표본화 정리⁠(sampling theorem)⁠와 이산 코사인 변환⁠(discrete cosine transform)⁠까지 갑니다. 함수를 다른 기저로 다시 쓰는 푸리에의 방법은 표현 바꾸기에서, 극한으로 근사를 통제하는 코시의 방법은 근사와 오차에서, 곡선을 직선으로 어림하는 미분⁠(differentiation)⁠은 선형화⁠(linearization)⁠에서 분야를 가로질러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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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분에서 회전까지 · 1편 · 미분 순간의 속도 속도계는 '지금 이 순간'의 속도를 보여 준다. 순간에는 시간이 흐르지 않는데, 무엇을 재는 걸까? 혼돈 나비의 날갯짓 방정식이 정해져 있으면 미래도 정해질까? 소수점 아래 몇 자리를 버린 계산이 날씨 예보의 한계를 드러냈다. 라플라시안 라플라시안, 가장 많이 재사용된 식 이웃의 평균에서 나를 뺀다. 이 한 줄이 열의 법칙이고, 도박꾼이 이길 확률이고, 전기 회로와 나무 세기이고, 북의 음색이고, 사진의 윤곽선이고, 그래프를 가르는 칼이고, 잡음에서 그림을 빚는 확산 모델의 밑그림이다. 측정의 수학 재는 순간 바뀐다 해안선의 길이는 자에 따라, 평균은 누구에게 묻느냐에 따라, 지표는 목표가 되는 순간 달라진다. 리처드슨의 국경과 프랙털 차원, 스티븐스의 척도, 버스 정류장과 타율의 역설, 스피어먼의 요인, 굿하트의 법칙과 보상 해킹을 한 줄로 꿴다. 게임과 증명 이기는 쪽이 존재한다 "이 판은 백이 이겼다"는 흑이 어떻게 두든 백에게 답이 있다는 말이다. 체스의 체르멜로 정리, ε–δ, 님의 이진법, 폰 노이만의 최소최대와 쌍대성, 논리의 한계를 재는 게임, 끝나지 않는 게임과 선택공리, 대화로 읽는 증명, 겨루며 배우는 신경망까지. 수학의 참을 두 사람의 게임으로 읽는다. 수학의 오류 틀린 증명이 만든 수학 틀린 증명은 흔하다. 드물게, "정확히 어디가 틀렸는가"라는 물음이 새 분야를 낳는다. 코시의 합 정리와 균등 수렴, 라메의 증명과 아이디얼, 켐프의 사슬, 푸앵카레의 회수된 논문과 혼돈, 프레게의 법칙과 러셀의 편지, 보예보츠키와 증명 보조기까지. 오류는 대개 서로 다른 두 가지를 하나로 여긴 자리에 있었다. 불가능성 정리 불가능의 증명 각의 삼등분, 5차방정식의 근의 공식, 모든 파일을 줄이는 압축, 멈춤을 판정하는 프로그램, 공정한 투표 규칙. 없다는 것은 어떻게 증명할까? 서로 먼 분야의 불가능성 증명들은 거의 모두 불변량, 세기, 대각선이라는 세 가지 무기 가운데 하나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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