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랭 메르센(Marin Mersenne)
파리 미니모회 수도원의 수도사로, 데카르트·페르마·갈릴레이 사이의 편지를 베껴 돌리며 17세기 유럽 과학의 우체국 노릇을 하고, 줄의 진동 법칙을 정리하고, 2ᵖ − 1 꼴의 소수(prime number)에 이름을 남긴 사람.
마랭 메르센은 1588년 프랑스 서부 멘 지방의 오이제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30년 넘게 이어진 종교 전쟁이 1598년 낭트 칙령으로 겨우 가라앉은 뒤, 프랑스의 가톨릭 교회는 신앙을 다시 세우는 일에 힘을 쏟고 있었습니다. 메르센은 앙리 4세가 세운 라플레슈의 예수회 학교에서 공부하고 파리 소르본에서 신학을 배운 뒤, 1611년 엄격한 청빈을 지키는 탁발 수도회인 미니모회에 들어갔습니다. 1619년부터 죽을 때까지 그는 파리 루아얄 광장(오늘날의 보주 광장) 근처의 수도원에 살았습니다. 그 무렵 유럽의 지식인들은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의 새 과학, 모든 앎을 의심하는 회의주의, 비밀스러운 마술과 연금술의 유행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메르센은 수학과 실험으로 얻은 앎은 확실하며 신앙과 어긋나지 않는다고 믿었고, 그 믿음으로 유럽의 학자들을 편지로 이었습니다.
나이
회의주의자와 마술사를 상대로. 그의 첫 책들은 논쟁서였습니다. 1623년 『창세기의 이름난 문제들』이라는 두꺼운 책에서 그는 파리에만 무신론자가 5만 명이라고 주장하며 이신론자와 자유사상가, 마술사를 공격했습니다. 과장된 숫자이지만 그가 무엇을 두려워했는지 보여 줍니다. 1625년의 『회의주의자에 맞선 학문의 진리』에서는 사물의 본질까지는 알 수 없더라도 수학과 역학이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에 대해 주는 앎은 믿을 수 있다고 논증했습니다. 영국의 의사 로버트 플러드가 우주의 조화를 신비주의로 풀자, 메르센은 친구 가상디와 함께 그를 비판했습니다. 신비한 대응 관계가 아니라 측정할 수 있는 양과 수로 자연을 다루라는 것이 그의 요구였습니다.
유럽의 우체국. 학술지가 없던 시절, 새 결과는 편지로 퍼졌습니다(편지 공화국). 메르센은 받은 편지를 베껴서 관심 있을 만한 사람들에게 보내고, 서로 모르는 학자들을 이어 주고, 스스로 문제를 내고 반론을 모았습니다. 그의 편지 상대에는 데카르트, 페르마, 로베르발, 가상디, 데자르그, 영국의 홉스, 네덜란드의 베이크만과 콘스탄테인 하위헌스, 이탈리아의 토리첼리가 있었습니다. 20세기에 모아 펴낸 그의 편지 전집은 17권에 이릅니다. 1635년 무렵부터는 그의 방에 파리의 학자들이 정기적으로 모였는데, 흔히 '파리 아카데미'라 불리는 이 모임은 1666년 세워진 왕립 과학 아카데미의 씨앗이 되었습니다(왕립학회와 과학 아카데미). 그는 동료들에게 문제를 던지는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굴러가는 바퀴 위의 한 점이 그리는 곡선, 곧 하위헌스가 뒷날 시계에 쓰게 될 사이클로이드(cycloid)에 주목하게 한 것도 그였고, 1630년대에 로베르발은 이 곡선 아래의 넓이(area)가 굴러가는 원 넓이의 정확히 세 배임을 보였습니다.
데카르트의 창구. 메르센과 데카르트는 라플레슈 학교의 선후배였습니다. 1628년 무렵부터 네덜란드로 옮겨 거처를 자주 바꾸며 지낸 데카르트에게 메르센은 바깥 세계와 닿는 거의 유일한 창구였고, 데카르트가 남긴 편지의 상당수가 메르센에게 보낸 것입니다. 1637–38년 페르마의 접선(tangent line) 구하는 법을 두고 두 사람이 날 선 편지를 주고받을 때도 모든 편지가 메르센의 방을 거쳤습니다(미분계수(derivative), 최적화(optimization)). 1641년 데카르트가 『성찰』을 펴낼 때 메르센은 원고를 돌려 여러 학자의 반론을 모았고, 데카르트는 그 반론과 자기 답변을 본문과 함께 실었습니다. 둘째 반론은 메르센 자신이, 셋째는 홉스가, 다섯째는 가상디가 쓴 것입니다. 한 권의 책을 내기 전에 반대 의견을 공개적으로 모으는 이 방식은 오늘날 동료 심사의 먼 조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갈릴레이를 알프스 북쪽으로. 1633년 갈릴레이가 종교재판에서 단죄된 뒤에도, 가톨릭 수도사인 메르센은 그의 과학을 프랑스에 알리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1634년 갈릴레이의 미발표 역학 강의록을 프랑스어로 옮겨 펴냈고, 1639년에는 『새로운 두 과학』의 내용을 풀어 쓴 책을 냈습니다. 그는 그대로 옮기지만 않았습니다. 떨어지는 물체가 1초에 얼마나 떨어지는지를 스스로 재어 보고 갈릴레이가 적은 수치와 맞지 않는다고 따졌고, 진자의 주기(period)와 길이의 관계도 직접 실험했습니다. 남의 결과를 소개하되 다시 재어 보는 태도가 그의 몫이었습니다.
줄의 진동 법칙. 1636–37년의 『보편적 조화』는 음악과 소리를 수학과 실험으로 다룬 방대한 책입니다. 여기서 그는 오늘날 '메르센의 법칙(Mersenne's laws)'이라 부르는 줄의 진동 규칙을 정리했습니다. 줄이 내는 음의 진동수(frequency)는 줄의 길이에 반비례하고, 줄을 당기는 힘(장력)의 제곱근에 비례하며, 줄의 단위 길이당 무게의 제곱근에 반비례한다는 것입니다. 길이를 절반으로 줄이면 한 옥타브 올라가는 것은 피타고라스 학파도 알았지만, 같은 옥타브를 얻으려면 장력은 네 배로 늘려야 한다는 것이 새로웠습니다. 오늘날의 식으로는
가락의 수를 세다. 같은 책에서 그는 음 몇 개로 만들 수 있는 가락이 몇 가지인지를 셌습니다. 음 여섯 개를 늘어놓는 순서는
메르센 수(Mersenne number). 1644년 『물리–수학 사색』의 머리말에서 그는
약수는 어떤 꼴인가. 메르센의 편지망은 이 수들을 두고도 돌아갔습니다. 1640년 페르마는 메르센에게 보낸 편지에서
컴퓨터 시대의 가장 큰 소수. 1930년 미국의 레머가 다듬은 뤼카–레머 판정법(Lucas–Lehmer test)은 메르센 수에만 쓰는 아주 빠른 방법입니다. 4에서 시작해 '제곱하고 2를 빼기'를 되풀이하면서 매번
진공 소식과 마지막 여행. 1644–45년 메르센은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피렌체와 로마의 학자들을 만났고, 토리첼리가 수은을 채운 유리관을 거꾸로 세우면 수은 기둥 위에 빈 공간이 생긴다는 실험을 했다는 소식을 프랑스로 가져왔습니다. 그 소식은 루앙에 있던 파스칼에게 닿았고, 파스칼은 1646년부터 이 실험을 되풀이하다 1648년 처남 페리에에게 퓌드돔산에 올라 수은 기둥이 높은 곳에서 짧아진다는 것을 확인하게 했습니다. 대기의 압력이 수은을 떠받친다는 증거였습니다. 파스칼은 10대 초반부터 아버지를 따라 메르센의 모임에 드나들었고, 열여섯 살에 쓴 원뿔곡선(conic section)에 관한 글도 이 모임에서 돌았습니다. 1646년에는 네덜란드의 콘스탄테인 하위헌스와의 편지를 통해 그의 아들 크리스티안과도 편지를 나누었습니다.
죽음, 그리고 남은 것. 메르센은 1648년 9월 폐의 병이 악화되어 수도원에서 죽었습니다. 그는 자기 몸을 해부해 의학에 쓰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전합니다. 방에는 유럽 곳곳에서 온 편지가 가득했습니다. 그가 죽은 뒤 파리의 학자들은 다른 사람의 집에서 모임을 이어 갔고, 1665년 학술지가 생기면서 편지로 돌던 소식은 인쇄된 지면으로 옮겨 갔습니다. 그는 위대한 정리를 증명한 사람으로 기억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알려지고 검토받아야 비로소 결과라는 생각, 서로 다른 나라와 종파의 학자들이 한 문제를 두고 대화할 수 있다는 믿음을 몸소 실천한 사람으로 기억됩니다. 그의 이름은 지금도 가장 큰 소수를 찾는 경쟁에 붙어 있습니다.
이어지는 곳. 그가 이끈 편지망은 편지 공화국에, 그의 모임이 자라 된 기관은 왕립학회와 과학 아카데미에 있습니다. 메르센 수는 소수, 소수 판정, 모듈러 연산으로, 줄의 진동 법칙은 파동방정식과 푸리에 급수로, 가락 세기는 순열로 이어집니다. 그의 방을 거쳐 간 사람들은 데카르트, 페르마, 파스칼, 하위헌스입니다.
관계.
- 편지 르네 데카르트 — 라플레슈 학교의 선후배로, 네덜란드에 숨어 지낸 데카르트가 파리와 닿는 거의 유일한 창구였습니다. 『성찰』의 반론을 모았고 둘째 반론은 메르센 자신이 썼습니다.
- 편지 피에르 드 페르마 — 1640년 페르마는 메르센에게 보낸 편지에서 2³⁷ − 1이 223으로 나누어떨어진다는 것을 보이며, 2ᵖ − 1의 약수는 모두 2kp + 1 꼴이라는 규칙을 알렸습니다.
- 영향을 받음 갈릴레오 갈릴레이 — 1634년 갈릴레이의 미발표 역학 강의록을 프랑스어로 옮기고 1639년 『새로운 두 과학』을 풀어 소개하면서, 낙하 실험의 수치를 스스로 다시 재어 따졌습니다.
- 영향을 줌 블레즈 파스칼 — 소년 파스칼은 아버지를 따라 메르센의 모임에 드나들었고, 메르센이 1645년 이탈리아에서 가져온 토리첼리의 진공 실험 소식은 파스칼의 대기압 실험으로 이어졌습니다.
- 편지 크리스티안 하위헌스 — 1646–47년 열일곱 살의 하위헌스와 편지를 나누었고, 늘어뜨린 사슬이 포물선(parabola)이 아니라는 그의 증명을 보고 그가 아르키메데스를 넘어설 것이라고 칭찬했다고 전합니다.
- 영향을 줌 레온하르트 오일러 — 오일러는 1772년 메르센의 목록에 있던 2³¹ − 1 = 2147483647이 소수임을 증명했습니다. 이 수는 그 뒤 오랫동안 알려진 가장 큰 소수였습니다.
연표.
- 1604년 앙리 4세가 세운 라플레슈의 예수회 학교에 들어가다
- 1611년 탁발 수도회인 미니모회에 들어가다
- 1619년 파리 루아얄 광장 근처의 미니모회 수도원에 자리 잡다
- 1623년 『창세기의 이름난 문제들』에서 무신론자와 마술사들을 공격하다
- 1634년 갈릴레이의 역학을 프랑스어로 옮겨 펴내다
- 1635년 자기 방에서 파리 학자들의 정기 모임을 시작하다(무렵)
- 1636년 『보편적 조화』를 펴내 줄의 진동 법칙을 정리하다
- 1641년 데카르트의 『성찰』에 실을 반론들을 모으다
- 1644년 2ᵖ − 1이 소수가 되는 p의 목록을 발표하고, 이탈리아에서 토리첼리의 진공 실험 소식을 가져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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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수론
… 4로 나누어 3이 남는 수는 두 제곱수의 합이 될 수 없습니다. 거꾸로 페르마는 1640년 크리스마스에메르센에게 보낸 편지에서, 4로 나누어 1이 남는 소수는 언제나 두 제곱수의 합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페르마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