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산타 찬드라 마할라노비스(Prasanta Chandra Mahalanobis)
퍼짐과 상관을 고려한 마할라노비스 거리(Mahalanobis distance)를 만들고, 인도 통계(statistics) 연구소와 전국 표본 조사(sample survey)를 세워 표본(sample)으로 나라를 재는 방법을 개척한 인도의 통계학자.
프라산타 찬드라 마할라노비스는 1893년 영국령 인도의 수도였던 캘커타에서 태어났습니다. 캘커타의 프레지던시 칼리지에서 물리학을 공부한 뒤 1913년 케임브리지 킹스 칼리지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그가 자란 벵골은 식민 통치의 행정 중심이자 인도 민족 운동과 문예 부흥의 중심이었습니다. 식민 정부는 인구 조사와 토지 조사로 막대한 자료를 쌓았지만, 그 자료를 과학적으로 다룰 인도인의 기관은 없었습니다. 그는 물리학자로 출발해, 그런 자료를 읽는 통계학을 인도에 세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이
그의 집안은 힌두교의 카스트와 우상 숭배를 비판하며 19세기 벵골 개혁 운동을 이끈 브라모 사마지의 일원이었고, 할아버지 대부터 이 공동체의 교육과 사회 활동에 깊이 관여했습니다. 프레지던시 칼리지에서는 무선 전파와 식물 생리를 연구한 자가디시 찬드라 보스, 인도 화학 공업의 개척자 프라풀라 찬드라 레이에게 배웠습니다. 식민지의 대학에서 인도인 과학자들이 세계 수준의 연구를 해낼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 준 이 스승들은, 과학을 민족의 자립과 이어 생각한 그의 세대에게 본보기였습니다. 케임브리지에서 그는 수학 졸업 시험 1부를 치른 뒤 물리학으로 자연과학 시험 2부를 마쳤습니다.
1915년 무렵 전쟁 때문에 귀국하는 배편이 늦어지는 사이, 킹스 칼리지의 지도 교수가 보여 준 칼 피어슨의 통계학 학술지 『바이오메트리카』를 도서관에서 읽고 통계학에 빠졌다고 전합니다. 그는 학술지 묶음을 사서 인도로 돌아와 프레지던시 칼리지에서 물리학을 가르치며 통계학을 혼자 익혔습니다. 케임브리지 시절 그는 라마누잔과도 가까이 지냈는데, 잡지의 퍼즐을 내밀자 라마누잔이 그 자리에서 모든 경우의 답을 주는 연분수(continued fraction)를 불러 주었다는 이야기는 그의 회고로 전합니다.
1920년대 그는 인류학자들이 모은 신체 측정 자료를 분석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벵골의 여러 카스트와 부족 집단에서 잰 머리 길이, 머리 너비, 코 높이 같은 수치였고, 그 뒤에는 몸의 치수로 집단의 서열을 매기려던 당시 인종 과학의 그늘이 있었습니다. 그가 붙든 것은 순수하게 통계적인 물음, 여러 특징을 함께 잰 두 무리가 서로 얼마나 다른가였습니다. 특징들을 좌표로 놓고 유클리드 거리(Euclidean distance)를 재면 두 가지가 잘못됩니다. 단위가 다른 특징들이 섞이고, 특징들이 서로 상관되어 있다는 사실이 무시됩니다. 키가 큰 사람은 대개 몸무게도 많이 나가므로, 키와 몸무게가 둘 다 큰 것은 놀랍지 않지만 키가 큰데 몸무게가 가벼운 것은 드뭅니다. 위의 식은 두 문제를 한꺼번에 풉니다. 공분산(covariance) 행렬(matrix)
그는 통계를 실제 문제에 쓰는 데 적극적이었습니다. 벵골과 오리사의 오랜 강우와 홍수 기록을 분석해 치수 계획에 의견을 냈고, 그 보고서는 뒷날 마하나디강의 댐 계획의 바탕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고 전합니다. 시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와 가까워 한동안 그가 세운 비스바바라티 대학의 일을 돕기도 했습니다. 1931년에는 프레지던시 칼리지의 자기 연구실에서 인도 통계 연구소를 시작했고, 1933년 학술지 『산키아』를 창간했습니다. 이 연구소는 통계학자 C. R. 라오를 비롯한 많은 통계학자를 길러 냈습니다.
연구소는 식민지 정부의 기관이 아니라 인도인들이 스스로 세운 학회였고, 처음 몇 해는 그와 동료들이 따 온 작은 조사 용역과 후원금으로 버텼습니다. 영국과 미국의 통계학자들과 잇는 끈은 그가 직접 만들었습니다. 1920년대 영국을 방문했을 때 그는 로담스테드로 피셔를 찾아가 실험 설계와 분산분석(analysis of variance)을 배웠고(골턴 연구소와 로담스테드), 1938년 초 캘커타에서 열린 인도 과학 대회에 피셔가 오자 연구소를 보여 주었습니다. 피셔는 그 뒤로도 여러 차례 인도를 찾았고, 『산키아』에 논문을 실어 이 학술지를 세계에 알렸습니다. 연구소에서 자란 라오는 1940년대 후반 케임브리지에서 피셔의 지도로 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그가 1945년 『캘커타 수학회보』에 발표한 추정의 정밀도(precision) 한계, 곧 평균적으로 참값을 겨냥하는(치우침 없는) 추정값이라면 그 분산(variance)이 자료가 담은 정보량으로 정해지는 어떤 값보다 작아질 수 없다는 한계는 오늘날 크라메르–라오 하한(Cramér–Rao bound)으로 불립니다. 식민지 캘커타의 한 연구실이 20년 만에 세계 통계학의 중심 가운데 하나가 된 것입니다.
그의 가장 큰 실험은 나라 전체를 표본으로 재는 일이었습니다. 1930년대 벵골의 황마 수확량을 모든 밭을 재지 않고 무작위로 고른 작은 구획들로 추정하면서, 그는 비용과 정확도를 함께 따져 표본의 크기와 배치를 정하는 방법을 다듬었습니다. 표본 평균(mean)의 오차는 표본 수의 제곱근에 반비례해 줄어들기 때문에(큰 수의 법칙(law of large numbers), 중심극한정리(central limit theorem)) 적은 비용으로도 나라 전체를 꽤 정확히 잴 수 있습니다. 조사원의 착오 같은 오차를 가늠하려고 표본을 여러 조로 나누어 서로 다른 조사원에게 맡기고 결과를 견주는 방법도 고안했습니다. 이런 경험이 1950년 시작된 인도 전국 표본 조사의 설계로 이어졌습니다.
표본 조사의 쓸모를 가장 아프게 보여 준 것은 1943년의 벵골 기근이었습니다. 전쟁으로 버마의 쌀이 끊기고 식민 정부의 대응이 늦어지는 사이 수백만 명이 굶주림과 병으로 죽었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이 땅과 가축을 팔고 떠돌게 되었는지 아무도 정확히 알지 못했습니다. 그의 연구소는 1944–1945년 벵골의 마을들을 무작위로 골라 가구마다 기근 전후의 형편을 조사해, 기근이 누구를 어떻게 무너뜨렸는지를 숫자로 보여 주었습니다. 작물 수확량 조사 방법을 두고는 농업연구위원회의 판두랑 수카트메와 오랫동안 논쟁했는데, 누가 조사를 맡고 오차를 어떻게 따질지를 둘러싼 이 다툼은 독립(independence) 인도의 통계 제도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관한 싸움이기도 했습니다. 1947년부터 그는 유엔 통계위원회의 표본 조사 소위원회를 이끌며, 조사원 여럿이 같은 지역을 나누어 맡게 해 오차를 가늠하는 그의 방법을 다른 나라들에 알렸습니다.
독립 뒤 그는 네루 정부의 계획 위원회에 참여해 1956년 시작된 2차 5개년 계획의 경제 모형을 세웠습니다. 투자를 중공업에 먼저 돌려야 장기 성장이 빨라진다는 모형이었고, 그 효과를 두고는 지금도 평가가 엇갈립니다. 농업과 소비재, 수출을 소홀히 해 성장이 더뎠다는 비판이 있는 반면, 독립 직후의 나라가 스스로 기계를 만들 기반을 닦았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그는 계산의 도구에도 관심이 많아 1956년 영국에서 들여온 인도의 첫 컴퓨터를 연구소에 설치했고, 1966년에는 자다브푸르 대학과 함께 트랜지스터(transistor) 컴퓨터를 직접 설계해 만들었습니다. 1959년 인도 의회는 법을 만들어 그의 연구소를 '국가 중요 기관'으로 정했습니다. 1945년 영국 왕립학회 회원이 되었고, 1972년 일흔아홉 번째 생일을 하루 앞두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생일인 6월 29일은 인도에서 '통계의 날'로 기념됩니다.
이어지는 곳. 퍼짐을 아는 거리의 기하(geometry)는 마할라노비스 거리에서, 자료 구름의 주축을 찾는 방법은 주성분 분석(principal component analysis)에서, 거리가 갖춰야 할 성질은 거리 함수(metric)에서 이어집니다. 이 거리는 오늘날 이상 거래를 찾거나 최근접 이웃 분류(k-nearest neighbors classification)에서 특징의 단위를 맞출 때 쓰입니다. 그를 통계학으로 이끈 사람은 칼 피어슨이었고, 평생의 동료는 로널드 피셔였습니다.
관계.
- 영향을 받음 로널드 피셔 — 로담스테드에서 피셔의 실험 설계를 배웠고, 피셔는 1938년 캘커타를 찾는 등 평생 그의 연구소를 후원한 친구가 되었습니다.
연표.
- 1912년 캘커타 프레지던시 칼리지에서 물리학 학위를 받다
- 1913년 케임브리지 킹스 칼리지로 유학을 떠나다
- 1915년 『바이오메트리카』를 들고 귀국해 프레지던시 칼리지에서 물리학을 가르치다
- 1931년 인도 통계 연구소를 세우다
- 1933년 통계학 학술지 『산키아』를 창간하다
- 1936년 '일반화된 거리'를 발표하다
- 1938년 캘커타의 인도 과학 대회에 피셔가 찾아오다
- 1944년 1943년 벵골 기근의 결과를 표본 조사로 재다
- 1945년 영국 왕립학회 회원이 되다
- 1947년 유엔 통계위원회의 표본 조사 소위원회 의장이 되다
- 1950년 인도 전국 표본 조사를 설계하다
- 1956년 2차 5개년 계획의 경제 모형을 세우고 연구소에 인도의 첫 컴퓨터를 들이다
- 1959년 인도 통계 연구소가 법으로 '국가 중요 기관'이 되다
- 1968년 인도 정부의 파드마 비부샨 훈장을 받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