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 개념 지도
시대와 장소(Times and places)

바그다드 지혜의 집(House of Wisdom (Bayt al-Ḥikma))

8세기 중엽부터 두 세기 반 동안 아바스 왕조의 바그다드에서 그리스·인도·페르시아의 과학이 아랍어로 옮겨지고 하나로 엮인 번역 운동⁠(translation movement)⁠과 그 상징인 칼리프의 서고. 알콰리즈미의 대수학과 인도식 자릿값 숫자가 여기서 나와 라틴 유럽으로 건너갔다.

750년 아바스 가문은 다마스쿠스의 우마이야 왕조를 무너뜨리고 칼리프 자리에 올랐습니다. 새 왕조를 떠받친 것은 제국 동쪽 호라산의 페르시아계 세력이었고, 762년 둘째 칼리프 알만수르는 옛 사산 왕조의 수도 크테시폰에서 멀지 않은 티그리스 강가에 둥근 성벽을 두른 새 수도 바그다드를 세웠습니다. 궁정 점성가들이 공사를 시작할 날을 골랐다고 전합니다. 페르시아만으로 나가는 뱃길과 중앙아시아로 이어지는 비단길이 만나는 이 도시에서, 그 뒤 두 세기 반 동안 그리스어로 된 과학과 철학의 책은 거의 모두, 시리아어와 페르시아어, 산스크리트어로 된 책도 적지 않게 아랍어로 옮겨졌습니다. 역사가들이 번역 운동이라 부르는 이 일의 상징으로 흔히 불리는 이름이 '지혜의 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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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의 집은 무엇이었나. 널리 퍼진 그림에서 지혜의 집은 칼리프 알마문(재위 813–833)이 세운 거대한 번역원 겸 학술원으로, 학자들이 한 지붕 아래 모여 번역하고 연구하던 곳입니다. 그러나 당대 기록에서 이 기관에 관한 언급은 짧고 드뭅니다. 디미트리 구타스 같은 역사가들은 그것이 사산 왕조 궁정의 전통을 이은 칼리프의 서고였고, 주로 페르시아어 문헌을 보관하고 옮기던 곳이었으리라고 봅니다. 그리스 과학의 번역은 한 기관의 사업이라기보다 칼리프와 대신 가문, 군 지휘관, 부유한 학자 집안이 제각기 돈을 댄 넓은 흐름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페이지에서 '지혜의 집'은 그 흐름 전체를 부르는 이름으로 쓰지만, 건물 하나가 모든 일을 했던 것처럼 읽지는 말아야 합니다.

왜 그 책들이 필요했나. 번역은 호기심만으로 굴러가지 않았습니다. 하루 다섯 번의 기도 시각과 메카 쪽 방향(키블라)을 정하고 달력을 맞추려면 천문학이 필요했고, 왕조의 앞날을 점치는 점성술은 궁정의 중요한 업무였습니다. 광대한 제국을 다스리는 관료들은 토지를 측량하고 세금을 매기고 운하를 팠으며, 이슬람 상속법은 유산을 여러 친족에게 정해진 분수대로 나누게 했습니다. 의사들은 갈레노스의 의학을 원했습니다. 구타스는 여기에 비잔틴 제국과의 경쟁도 한몫했다고 봅니다. 그리스인은 조상의 지혜를 잊었고 이제 그 계승자는 우리라는 주장이 알마문 시대 궁정의 선전이었다는 것입니다.

종이. 이 모든 일을 싸게 만든 기술이 종이였습니다. 8세기 중엽 중앙아시아의 사마르칸트를 거쳐 제지술이 이슬람 세계에 들어왔고, 8세기 말에는 바그다드에도 종이 공방이 섰습니다. 751년 탈라스 전투에서 사로잡힌 중국인 장인들이 기술을 전했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지만 후대의 전승입니다. 파피루스는 이집트에서만 났고 양피지는 비쌌습니다. 종이가 흔해지자 바그다드에는 책을 베끼고 파는 서적상들의 거리가 생겼고, 한 번 옮겨진 번역은 여러 벌로 베껴져 제국 곳곳으로 흩어질 수 있었습니다. 한 서고에 책이 모여 있던 알렉산드리아와 달리, 이 시대의 과학은 수많은 사본 속에서 살아남았습니다.

누가 옮겼나. 번역가의 상당수는 무슬림이 아니었습니다. 시리아어를 쓰던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인들은 이미 수백 년 전부터 그리스 의학과 논리학을 시리아어로 옮겨 왔고, 그 경험이 아랍어 번역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그 대표인 후나인 이븐 이스하크는 여러 사본을 대조해 원문을 바로잡은 뒤 옮기는 엄격한 방법으로 이름이 높았고, 알마문이 그에게 번역한 책의 무게만큼 금을 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합니다. 알하자즈 이븐 유수프는 『원론』을 하룬 알라시드 때와 알마문 때 두 번 옮겼습니다. 하란 출신의 사비교도 타비트 이븐 쿠라는 아폴로니오스의 『원뿔곡선론』 같은 그리스 기하학자들의 책을 옮기고 앞사람의 『원론』 번역을 다듬었으며, 직각삼각형⁠(right triangle)⁠에만 성립하는 피타고라스 정리⁠(Pythagorean theorem)⁠를 임의의 삼각형으로 넓힌 정리와, 친화수(220과 284처럼 자기 자신을 뺀 약수⁠(divisor)⁠를 모두 더하면 서로 상대 수가 되는 두 수)를 만드는 규칙을 찾은 수학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를 바그다드로 데려온 것은 비잔틴 제국에 사람을 보내 사본을 구해 오게 할 만큼 부유했던 무사의 세 아들(바누 무사)이었습니다. 철학자 알킨디도 번역가들을 모아 그리스 철학을 아랍어로 옮기고 해설했습니다.

인도에서 온 것. 그리스만이 아니었습니다. 770년대 인도에서 온 사절단의 한 천문학자가 알만수르의 궁정에 7세기 인도의 수학자이자 천문학자 브라마굽타 계열의 천문서를 가져왔고, 알파자리 등이 이를 아랍어로 옮겨 『신드힌드』라는 천문표를 만들었습니다. 인도 천문학은 원의 현 대신 그 절반, 곧 오늘날의 사인⁠(sine)⁠을 썼습니다. 산스크리트어 '지바'를 소리대로 옮긴 아랍어 낱말은 자음만 적는 글자 때문에 '주머니, 굽은 곳'을 뜻하는 '자이브'로 읽혔고, 12세기의 라틴어 번역가가 이를 같은 뜻의 라틴어 sinus로 옮기면서 사인이라는 이름이 생겼습니다. 더 큰 선물은 아홉 개의 숫자와 빈자리를 나타내는 0으로 어떤 수든 적는 인도의 자릿값 표기였습니다(진법⁠, positional notation⁠). 증명하는 그리스의 기하⁠(geometry)⁠와 계산하는 인도의 산술이 바그다드에서 한 책상 위에 놓였습니다.

알콰리즈미. 두 전통을 가장 잘 엮은 사람이 중앙아시아 호라즘 출신의 무함마드 이븐 무사 알콰리즈미입니다. 알마문에게 바친 『복원과 대비의 계산에 관한 요약서』(820년대 무렵)의 머리말에서 그는 이 책이 상속과 유언, 재산 분할, 소송과 교역, 토지 측량과 운하 공사에서 사람들이 늘 필요로 하는 계산을 위한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는 기호 없이 모든 것을 말로 썼고, 방정식을 '제곱'(오늘날의 x²), '근'(x), '수'(상수)로 이루어진 여섯 가지 꼴로 나누어 각각의 풀이법을 주었습니다. '제곱이 근과 같다'(x² = 5x), '제곱과 근이 수와 같다'(x² + 10x = 39) 같은 꼴입니다. 음수를 쓰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항이 양수가 되도록 한쪽에 모으는 방식에 따라 꼴이 여섯 가지로 나뉘었습니다. 빼는 항을 반대편으로 옮겨 '복원'하는 일이 알자브르(al-jabr)였고, 여기서 algebra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그의 유명한 예 x2+10x=39x^2 + 10x = 39에서는 한 변이 xx인 정사각형의 두 변에 폭 5짜리 직사각형을 하나씩 붙입니다. 그러면 모서리에 한 변이 5인 빈자리가 남고, 그 넓이⁠(area)⁠ 25를 채우면 전체는 한 변이 x+5x + 5이고 넓이가 39+25=6439 + 25 = 64인 정사각형이 됩니다. 따라서 x+5=8x + 5 = 8, 곧 x=3x = 3입니다. 계산은 인도식으로 하고 정당화는 그리스식 그림으로 하는 방식입니다. 인도 숫자로 셈하는 법을 다룬 그의 다른 책은 아랍어 원본이 사라지고 라틴어 번역만 남았는데, 그 번역이 '알고리즈미가 말하기를'로 시작하면서 그의 이름이 알고리즘⁠(algorithm)⁠이 되었습니다.

하늘과 땅을 재다. 알마문은 바그다드와 다마스쿠스에 관측소를 두어 프톨레마이오스의 표를 새 관측으로 고치게 했고, 천문학자들을 메소포타미아 북부의 신자르 평원으로 보내 자오선⁠(meridian)⁠ 1도의 길이, 곧 남북으로 곧장 걸어서 위도가 1도 바뀌는 거리를 직접 재게 했습니다. 천 년도 더 전에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장이 그림자로 한 일을, 이번에는 북극성의 고도가 1도 바뀔 때까지 평원을 걸어가며 한 것입니다. 9세기의 천문학자 하바시 알하시브는 막대 그림자의 길이를 각마다 적은 표, 곧 오늘날의 탄젠트⁠(tangent)⁠ 표를 만들었고, 뒤이은 세대는 메카 쪽 방향을 구하려고 구면기하⁠(spherical geometry)⁠의 공식을 다듬었습니다. 1000년 무렵 바그다드의 알카라지는 (a + b)ⁿ을 펼칠 때 나오는 계수들, 곧 이항계수⁠(binomial coefficient)⁠의 표(파스칼의 삼각형⁠, Pascal's triangle⁠)를 만들고 앞 단계에서 다음 단계를 이끌어 내는 논증을 썼다고, 그의 책을 인용한 후대의 알사마우알이 전합니다. 수학적 귀납법⁠(mathematical induction)⁠의 이른 모습으로 꼽히는 논증입니다.

흩어지고, 끝나다. 10세기에 들어 칼리프의 권력은 약해졌고, 945년에는 페르시아계 부와이 왕조가 바그다드를 장악했습니다. 후원은 지방의 궁정들로 흩어졌습니다. 카이로에서는 이븐 알하이삼이 광학을, 가즈니에서는 알비루니가 인도의 학문과 지구의 크기를 연구했고, 11–12세기 페르시아의 시인이자 수학자 오마르 하이얌은 3차방정식⁠(cubic equation)⁠을 원뿔곡선⁠(conic section)⁠으로 풀었습니다. 이를테면 원과 포물선⁠(parabola)⁠을 겹쳐 그리고, 두 곡선이 만나는 점의 좌표에서 방정식의 양수 근을 읽어 낸 것입니다. 1258년 몽골의 훌라구가 이끄는 군대가 바그다드를 약탈하면서 아바스 칼리프 체제는 끝났습니다. 도서관의 책을 강에 던져 티그리스강이 잉크로 검게 물들었다는 이야기는 전승입니다. 이듬해 훌라구는 이란 북서부의 마라가에 큰 천문대를 세워 천문학자이자 수학자인 나시르 앗딘 투시에게 맡겼고, 투시는 평행선 공준⁠(parallel postulate)⁠을 증명하려는 오랜 시도를 이어 갔습니다. 지혜의 집이라는 이름은 몽골군이 오기 훨씬 전부터 기록에서 희미해져 있었습니다.

라틴 유럽으로. 이 성과가 유럽에 닿은 곳은 두 문명이 맞닿은 경계였습니다. 1085년 카스티야가 톨레도를 차지한 뒤 그곳에는 아랍어 장서가 남았고, 12세기 내내 유럽 각지의 학자들이 모여들어 아랍어 책을 라틴어로 옮겼습니다. 체스터의 로버트는 1145년 알콰리즈미의 대수학을, 크레모나의 제라르도는 1175년 『알마게스트』를 비롯한 수십 권을 옮겼고, 바스의 애덜라드는 『원론』을 아랍어본에서 라틴어로 옮겼습니다. 시칠리아와 북아프리카의 항구도 통로였습니다. 피사 상인의 아들 피보나치는 알제리의 부지에서 인도 숫자로 셈하는 법을 배워 1202년 『산반서』를 썼고, 그 책은 이탈리아 셈법 학교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algebra와 algorithm, 아랍어 sifr(빈 것)에서 온 zero와 cipher, 그리고 sine이라는 말이 이 길을 따라 유럽의 언어로 들어갔습니다.

이어지는 곳. 인도에서 온 숫자는 진법에서, 알콰리즈미의 이름은 알고리즘에서, 인도의 반현⁠(half-chord)⁠은 사인과 코사인⁠(sine and cosine)⁠과 탄젠트에서 이어집니다. 알카라지의 표는 600년 뒤 파스칼의 이름이 붙은 파스칼의 삼각형으로, 알킨디가 글자가 나오는 빈도를 세어 암호를 푼 방법은 알킨디의 페이지에서 볼 수 있습니다. 로마 숫자로는 어렵던 곱셈이 자릿값 표기로는 쉬워지듯, 같은 수를 어떻게 적느냐가 계산의 난이도를 바꾸는 일은 표현 바꾸기가 다룹니다. 이곳이 물려받은 책들은 알렉산드리아 무세이온에서 왔고, 이곳의 대수학은 르네상스 이탈리아의 대수학 경연에서 3차방정식에 이릅니다. 원과 명을 거친 이슬람 천문표는 조선의 역법에도 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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