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스파르 몽주(Gaspard Monge)
프랑스의 기하학자. 입체를 두 장의 투영도로 옮기는 화법기하학(descriptive geometry)을 만들고, 흙을 옮기는 최소 비용 문제로 최적 수송(optimal transport) 이론을 열었으며, 에콜 폴리테크니크를 세워 한 세대의 기하학자를 길렀다.
가스파르 몽주는 1746년 프랑스 부르고뉴의 포도주 도시 본에서 작은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오라토리오회가 운영하는 학교에서 공부했고, 열여섯 살에 직접 만든 측량 도구로 고향 본의 커다란 지도를 그렸습니다. 그가 자란 루이 15세의 프랑스는 7년 전쟁에서 지고 군대와 도로와 운하를 다시 정비하던 나라였습니다. 요새를 쌓고 다리를 놓고 돌을 깎는 일에는 입체를 정확히 종이에 옮기고 종이에서 다시 입체를 읽어 내는 기술이 필요했습니다. 몽주의 수학은 이 기술자들의 세계에서 태어났고, 혁명기에는 국가가 기술자를 기르는 방식 자체를 바꾸었습니다.
나이
본의 지도를 본 공병 장교의 추천으로 그는 1765년 메지에르의 왕립 공병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귀족만 장교가 될 수 있던 학교였기에 평민인 그는 제도와 모형 만들기를 맡는 아래 반에 배치되었습니다. 그곳에서 그에게 요새의 '차폐(auditory masking)' 문제가 맡겨졌습니다. 적의 대포가 놓일 수 있는 모든 자리에서 요새 안이 보이지 않도록 성벽의 높이를 정하는 문제로, 그때까지는 긴 수치 계산으로 풀던 일이었습니다. 몽주는 기하학적 작도로 금세 답을 냈고, 너무 빨라서 처음에는 계산을 하지 않았다는 의심까지 받았다고 합니다. 그 방법이 인정받으면서 그는 1769년 이 학교의 수학 교사가 되었고, 그의 작도법은 오랫동안 군사 기밀로 다루어졌습니다.
그 방법이 오늘날의 화법기하학입니다. 입체를 바닥 평면에 위에서 수직으로 비춘 그림(평면도)과 벽 평면에 앞에서 수직으로 비춘 그림(입면도)을 그린 뒤, 벽 평면을 두 평면이 만나는 선, 곧 기선을 축으로 90도 눕혀 한 장의 종이에 놓습니다(정사영, orthogonal projection). 공간의 점 (x, y, z)는 평면도에서는 (x, y), 입면도에서는 (x, z)로 나타나고, 두 그림의 점은 기선에 수직인 한 직선 위에 놓입니다. 거꾸로 두 그림을 보면 세 좌표를 모두 되찾을 수 있습니다. 한 장의 그림으로는 깊이를 잃지만, 서로 수직인 두 방향의 그림은 입체를 빠짐없이 기록하는 것입니다. 몽주는 이 위에서 선분의 참 길이를 구하고, 두 곡면이 만나는 곡선을 그리고, 돌을 어떤 모양으로 깎아야 아치가 맞물리는지를 정하는 작도법을 체계로 만들었습니다. 오늘날의 기계 설계 도면과 컴퓨터 그래픽의 선형 변환과 투영이 그 후손이고, 그의 제자들의 손에서는 사영기하(projective geometry)가 자라났습니다.
1780년 과학 아카데미에 들어간 이듬해, 그는 공병의 일상에서 나온 또 하나의 문제를 논문으로 냈습니다. 한곳에서 파낸 흙을 다른 곳에 메워 쌓을 때, 흙의 각 부분을 어디로 보내야 옮기는 일의 총량이 가장 적은가? 흙을 아주 작은 덩이들로 나누어 생각하면, 한 덩이를 옮기는 비용은 그 양에 옮긴 거리를 곱한 것이고 목표는 그 합을 가장 작게 하는 것입니다(위의 식에서 T는 각 점의 흙을 보낼 곳을 정하는 규칙입니다). 몽주의 가장 이름난 관찰은 가장 좋은 방법에서는 두 덩이의 길이 서로 엇갈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같은 양의 덩이 A가 C로, 덩이 B가 D로 가는 두 길이 X자로 엇갈린다면, 목적지를 맞바꾸어 A는 D로, B는 C로 보내 봅니다. 두 길이 엇갈린 점을 거쳐 가는 길과 비교하면 삼각 부등식(triangle inequality) 때문에 두 길의 길이의 합이 늘지 않고, 네 점이 한 직선 위에 있지 않으면 엄밀히 줄어듭니다. 그래서 그런 엇갈림이 남아 있는 한 아직 최적이 아닙니다.
이 문제는 이름 그대로 흙더미를 넘어섰습니다. 흙 한 덩이를 쪼개지 않고 한 곳에만 보내야 한다는 조건 때문에 몽주의 문제는 매우 어려웠고, 1942년 소련의 칸토로비치가 흙을 쪼개어 여러 곳으로 나눌 수 있게 문제를 넓히면서 선형 계획법(linear programming)으로 풀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1948년 자기 문제를 몽주의 문제와 잇는 논문을 썼습니다. 1987년 프랑스의 브르니에는 처음 흙이 고르게 번진 분포일 때 거리의 제곱을 비용으로 하면 가장 좋은 옮기기가 어떤 볼록 함수(convex function)의 기울기(slope)로 주어진다는 것을 보였습니다. 이 이론을 크게 넓힌 빌라니(2010년 필즈상(Fields Medal))에 이르는 최적 수송은 오늘날 기계 학습(machine learning)에서 두 분포 사이의 거리를 재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는 실험가이기도 했습니다. 1783년 메지에르에서 수소와 산소를 태워 물을 만드는 실험을 해, 같은 무렵 파리의 라부아지에와 영국의 캐번디시가 도달한 결론, 곧 물이 원소(element)가 아니라 화합물이라는 결론에 따로 이르렀습니다. 같은 해 그는 해군 사관 후보생의 시험관이 되어 파리로 옮겼습니다. 그리고 1789년, 혁명이 그의 삶을 바꾸었습니다. 열렬한 공화파가 된 그는 1792년 8월 해군 장관이 되어 이듬해 봄까지 일했고, 유럽의 여러 나라가 프랑스를 둘러싼 1793–94년에는 화약과 대포의 생산을 조직하며 대포 제조법을 설명하는 책을 썼습니다. 미터법을 정하는 도량형 위원회에도 참여했습니다.
그의 가장 오래 남은 혁명의 작품은 학교였습니다. 1794년 그는 라자르 카르노 등과 함께 전쟁과 공공사업에 필요한 기술자를 시험으로 뽑아 기르는 학교, 곧 에콜 폴리테크니크를 설계했습니다. 신분이 아니라 실력으로 뽑은 학생들이 해석학(mathematical analysis)과 역학, 화학, 그리고 그의 화법기하학을 배웠습니다. 몽주는 학생들과 가까이 지내는 교사로 사랑을 받았고, 그의 제자들 가운데 퐁슬레는 1812년 러시아 원정에서 포로가 되어 사라토프의 수용소에서 사영기하의 원리를 되새겨 뒤에 책으로 냈습니다. 1795년 잠시 문을 연 사범학교에서 한 그의 강의는 속기로 받아 적혀 1799년 『화법기하학』이 되었고, 그 청중 가운데 푸리에가 있었습니다.
그는 나폴레옹과 가까웠습니다. 1796년 이탈리아에서 전리품으로 가져갈 미술품과 학술 자료를 고르는 위원회에서 일하며 젊은 장군과 친해졌고, 1798년에는 이집트 원정에 따라가 카이로에 세운 이집트 학사원의 원장을 맡았습니다. 푸리에가 그 서기였습니다. 사막을 행군하던 병사들이 본 신기루를 빛이 뜨거운 공기층에서 휘는 것으로 설명한 논문도 이때 썼습니다. 이듬해 나폴레옹과 함께 프랑스로 돌아온 그는 원로원 의원이 되었고, 1808년에는 펠뤼즈 백작의 작위를 받았습니다.
수학자로서 그의 또 다른 유산은 곡면의 미분기하학입니다. 1807년의 『해석학의 기하학 응용』에서 그는 곡면을 식으로 다루며, 곡면 위의 각 점에서 가장 많이 휘는 방향과 가장 적게 휘는 방향, 두 서로 수직인 방향을 따라가는 '곡률선(line of curvature)'을 연구했습니다. 이 두 방향의 휜 정도를 곱한 값이 1827년 가우스가 곡면 안에서만 잴 수 있음을 보인 가우스 곡률(Gaussian curvature)입니다. 몽주는 곡면과 편미분방정식(partial differential equation)을 한 몸으로 보았고, 그가 다룬 방정식 가운데 하나인 몽주–앙페르 방정식(Monge–Ampère equation)은 앞의 브르니에의 결과에서 가장 좋은 옮기기가 만족하는 방정식으로 다시 나타났습니다. 흙 옮기기와 곡면의 기하(geometry)가 두 세기 만에 한 방정식에서 만난 것입니다.
나폴레옹이 무너지자 그도 무너졌습니다. 1816년 왕정복고 정부는 공화파인 그를 과학 아카데미에서 내쫓았고, 그 빈자리에 젊은 코시가 임명되었습니다. 에콜 폴리테크니크에서도 물러난 그는 1818년 파리에서 죽었습니다. 정부는 학생들이 장례식에 가는 것을 막았지만, 학생들은 이튿날 무리를 지어 그의 무덤을 찾아갔다고 전합니다. 1989년 프랑스 혁명 200주년에 그의 유해는 판테온으로 옮겨졌습니다.
이어지는 곳. 흙을 옮기는 문제는 최적 수송과 선형 계획법에서, 두 방향의 투영으로 입체를 읽는 방법은 정사영과 사영기하에서, 곡면이 휜 정도는 가우스 곡률과 측지선(geodesic)에서 볼 수 있습니다. 가장 적은 비용을 찾는 이야기는 가장 좋은 것 고르기에, 그가 세운 학교와 혁명기 파리의 수학은 에콜 폴리테크니크에 있습니다.
관계.
- 함께 연구 조제프 푸리에 — 1795년 사범학교에서 푸리에가 그의 강의를 들었고, 이집트 원정에서는 몽주가 이집트 학사원의 원장, 푸리에가 서기를 맡았습니다.
- 함께 연구 조제프루이 라그랑주 — 에콜 폴리테크니크와 사범학교에서 함께 가르쳤고, 1807년 푸리에의 열 논문을 함께 심사했습니다.
- 영향을 줌 레오니트 칸토로비치 — 칸토로비치는 1942년 흙을 쪼개어 나누는 수송 문제를 세운 뒤, 1948년 '몽주의 한 문제에 관하여'라는 논문에서 그것을 몽주의 1781년 문제와 이었습니다.
연표.
- 1765년 메지에르의 왕립 공병학교에 제도공으로 들어가다
- 1769년 메지에르 공병학교의 수학 교사가 되다
- 1780년 과학 아카데미 회원이 되다
- 1781년 파낸 흙을 옮기는 최소 비용 문제를 다룬 논문을 싣다
- 1783년 해군 사관 후보생의 시험관이 되고, 수소와 산소로 물을 합성하다
- 1792년 혁명 정부의 해군 장관이 되다
- 1794년 에콜 폴리테크니크 설립을 이끌고 화법기하학을 가르치다
- 1798년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에 따라가 이집트 학사원 원장을 맡다
- 1799년 『화법기하학』을 책으로 내다
- 1807년 『해석학의 기하학 응용』을 내다
- 1816년 왕정복고 정부에 의해 과학 아카데미에서 쫓겨나다
이 인물이 나오는 긴 글
이 인물을 언급하는 페이지
- 연립일차방정식과 역행렬
… 소거법⟧이 표준입니다. 등식 대신 부등식이 들어가면 또 다른 분야가 열립니다. 1781년 프랑스 수학자가스파르 몽주는 흙더미를 구덩이로 옮길 때 흙을 나른 거리의 합을 가장 작게 하는 방법을 물었습니다. 1942년 …
- 최적 수송
… 등식 아래서 일차식을 가장 작게 하는 선형 계획 문제가 됩니다. 문제를 처음 적은 사람은 프랑스의가스파르 몽주로, 1781년 논문에서 파낸 흙(déblais)을 메울 곳(remblais)으로 옮기는 비용을 …
- 사영기하
… 포로수용소에서 쓴 기하학. 사영기하를 하나의 이론으로 세운 사람은 퐁슬레였습니다. 에콜 폴리테크니크에서가스파르 몽주에게 화법기하를 배운 그는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에 공병 장교로 나갔다가 1812년 크라스노이 전투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