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 개념 지도
인물

소피 제르맹(Sophie Germain)

여성이 대학에 들어갈 수 없던 시대에 독학으로 수학을 익혀, 휘는 판의 진동 방정식으로 파리 학사원의 상을 받고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Fermat's Last Theorem)⁠에 대한 첫 일반적 결과를 남긴 프랑스의 수학자.

Δ2w+ρhD ∂2w∂t2=0\Delta^2 w + \frac{\rho h}{D}\,\frac{\partial^2 w}{\partial t^2} = 0

소피 제르맹은 1776년 파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가 자라던 시절 프랑스의 대학과 학술 기관은 여성에게 닫혀 있었고, 수학을 배우는 길은 책과 편지뿐이었습니다. 그는 그 두 길만으로 당대의 가장 어려운 두 문제, 곧 떨리는 판의 방정식과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에 이름을 남겼습니다. 오늘날 그의 이름은 판의 진동 이론과 pp와 2p+12p+1이 모두 소수⁠(prime number)⁠인 '제르맹 소수'에 남아 있습니다.

굵은 막대가 이 사람의 생애이고, 흰검은 점은 페이지 끝 연표에 적은 일들입니다. 가는 막대는 같은 시대를 산 이 위키의 인물들입니다. 나이를 끌어 보세요.

나이 세 ·

전하는 이야기로는, 혁명으로 거리가 어수선하던 1789년 무렵 열세 살의 제르맹은 아버지의 서재에서 아르키메데스가 로마 병사에게 죽는 순간에도 도형에 몰두해 있었다는 대목을 읽고, 사람을 그렇게 사로잡는 학문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졌습니다. 부모는 딸이 밤에 공부하는 것을 말리려 했다고 하지만, 그는 라틴어와 미적분⁠(calculus)⁠을 혼자 익혔습니다. 1794년 에콜 폴리테크니크가 문을 열자 여성인 그는 입학할 수 없었지만 강의록을 구해 읽었고, 그곳 학생이던 앙투안오귀스트 르블랑의 이름으로 라그랑주에게 과제를 보냈습니다. 답안의 솜씨에 놀란 라그랑주가 '르블랑'을 찾아왔다가 그가 여성임을 알고도 계속 격려했다고 전합니다.

같은 가명으로 그는 1804년부터 가우스에게 『산술 연구』에 관한 편지를 보냈습니다. 1806년 프랑스군이 가우스가 살던 브라운슈바이크를 차지하자, 그는 아르키메데스의 운명이 가우스에게 되풀이될까 걱정해 집안과 가까운 장군에게 가우스를 보살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가우스는 뒤에 그 부탁을 한 사람이 편지의 '르블랑'임을 알게 되었고, 1807년 여성이 이런 공부를 하려면 편견과 싸워야 했을 터이니 더 큰 용기와 재능이 있어야 한다는 뜻의 답장을 보냈습니다.

정수론⁠(number theory)⁠에서 그가 남긴 가장 유명한 결과는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에 대한 것입니다. 지수 nn이 하나씩 주어질 때마다 따로 증명하던 시절에, 그는 여러 지수를 한꺼번에 다루는 방법을 찾았습니다. 오늘날 '제르맹의 정리'라 부르는 형태는 이렇습니다. 소수 pp에 대해 2p+12p+1도 소수이면, xp+yp=zpx^p + y^p = z^p에서 x,y,zx, y, z가 모두 pp의 배수⁠(multiple)⁠가 아닌 해는 없습니다(이른바 첫째 경우). 증명은 모듈러 연산⁠(modular arithmetic)⁠으로 2p+12p+1로 나눈 나머지⁠(remainder)⁠를 따지는 것입니다. 이 결과는 1823년 르장드르의 논문을 통해 그의 이름과 함께 알려졌습니다. 그가 남긴 원고와 편지를 뒤에 연구한 역사가들은, 그가 마지막 정리 전체를 증명하려는 더 큰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1808년 음향학자 클라드니가 파리에서 모래를 뿌린 금속판이 그리는 무늬를 보여 주자, 이듬해 학사원은 나폴레옹의 승인을 받아 이 무늬를 설명하는 수학 이론에 상을 걸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수학자는 라플라시안⁠(Laplacian)⁠과 고유 모드⁠(eigenmode)⁠를 다룰 도구가 부족하다며 나서지 않았습니다. 1811년 마감에 원고를 낸 사람은 제르맹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그는 판이 휘는 정도, 곧 곡률⁠(curvature)⁠에 비례해 되돌리는 힘이 생긴다는 가정에서 출발했지만 계산에 잘못이 있었고, 심사위원이던 라그랑주가 그 가정에서 나오는 올바른 방정식을 적었습니다. 판의 운동은 라플라시안을 두 번 거듭한 4계 방정식(위의 식)을 따릅니다. 1813년의 두 번째 원고는 가작에 그쳤고, 세 번째 원고로 1816년 상을 받았지만, 시상식에는 나가지 않았다고 전합니다. 판의 가장자리에서 맞추어야 할 조건은 여전히 틀렸다는 평가를 받았고, 1850년 키르히호프가 이를 바로잡았습니다.

상을 받은 뒤에도 그의 자리는 불안했습니다. 학사원의 회의에 드나들 수 있게 된 것은 푸리에가 종신 서기가 된 뒤의 일이었다고 전합니다. 1821년 그는 탄성 곡면의 이론을 다듬은 책을 자비로 펴냈고, 같은 문제를 다루던 푸아송, 나비에 같은 동료들과 경쟁하며 연구를 이어 갔습니다. 1831년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났을 때, 가우스는 괴팅겐 대학이 그에게 명예 학위를 주도록 추천해 두었지만 수여되기 전이었습니다. 사망 신고서에는 그의 직업이 수학자가 아니라 '연금 생활자'로 적혔다는 이야기가 전합니다.

이어지는 곳. 판의 방정식이 어떻게 라플라시안에서 나오는지, 클라드니의 모래 무늬가 왜 고유 모드의 마디선⁠(nodal line)⁠인지는 라플라시안 페이지와 긴 글 「라플라시안, 가장 많이 재사용된 식」 5절에서 직접 돌려 볼 수 있습니다. 조화 함수⁠(harmonic function)⁠와 에너지 최소화의 관계는 조화 함수와 변분법⁠(calculus of variations)⁠에, 그가 씨름한 정수론의 배경은 소수와 모듈러 연산에 있습니다. 편지를 나눈 가우스와 르장드르의 페이지에서도 같은 시대를 볼 수 있습니다.

관계.

가운데가 이 사람, 둘레가 이어진 인물들입니다. 선의 색은 관계의 종류(초록 스승·제자, 파랑 함께 연구, 보라 편지, 빨강 논쟁, 주황 영향)이고, 다른 인물의 페이지에 적힌 관계도 함께 모았습니다.

  • 영향을 받음 조제프루이 라그랑주 — 가명으로 보낸 과제를 읽은 라그랑주가 직접 찾아와 격려했고, 뒤에 판 진동 공모에서는 심사위원으로서 그의 첫 원고를 바로잡은 방정식을 적었습니다.
  • 편지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 — 1804년부터 '르블랑'이라는 이름으로 정수론 편지를 주고받았고, 정체가 알려진 뒤 가우스는 그의 용기와 재능을 높이 산다는 답장을 보냈습니다.
  • 편지 아드리앵마리 르장드르 — 르장드르와 편지로 정수론을 논의했고, 르장드르는 1823년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에 관한 논문에서 그의 정리를 그의 이름으로 소개했습니다.

연표.

  • 1776년 파리의 부유한 비단 상인 집안에서 태어나다
  • 1789년 혁명으로 집 밖이 어수선하던 무렵, 아버지의 서재에서 아르키메데스의 죽음 이야기를 읽고 수학에 빠졌다고 전하다
  • 1794년 새로 문을 연 에콜 폴리테크니크의 강의록을 구해 공부하고, '르블랑'이라는 이름으로 라그랑주에게 과제를 보내다
  • 1804년 같은 가명으로 가우스에게 『산술 연구』에 관한 편지를 보내기 시작하다
  • 1807년 프랑스군이 브라운슈바이크를 차지한 뒤 가우스의 안전을 장군에게 부탁한 일로, 가우스가 그의 정체를 알게 되다
  • 1811년 탄성판의 진동에 관한 학사원 현상 공모에 유일한 응모자로 원고를 내다
  • 1813년 고친 원고로 가작을 받다
  • 1816년 세 번째 원고로 학사원의 상을 받다
  • 1821년 『탄성 곡면의 이론에 관한 연구』를 자비로 펴내다
  • 1823년 르장드르가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에 관한 논문에서 그의 정리를 소개하다
  • 1831년 파리에서 세상을 떠나다

이 인물이 나오는 긴 글

라플라시안 라플라시안, 가장 많이 재사용된 식 이웃의 평균에서 나를 뺀다. 이 한 줄이 열의 법칙이고, 도박꾼이 이길 확률이고, 전기 회로와 나무 세기이고, 북의 음색이고, 사진의 윤곽선이고, 그래프를 가르는 칼이고, 잡음에서 그림을 빚는 확산 모델의 밑그림이다.

이 인물을 언급하는 페이지

이 페이지가 가리키는 개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