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클리드(Euclid)
기원전 300년 무렵 알렉산드리아에서 그리스의 기하학과 수론을 『원론』 13권으로 엮어, 정의와 공준(postulate)에서 출발해 모든 것을 증명으로 쌓는 방식의 본보기를 남긴 수학자.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뒤 그의 장군 프톨레마이오스가 이집트를 차지했고, 나일강 어귀의 새 도시 알렉산드리아는 그리스 학문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유클리드는 그 무렵, 기원전 300년 앞뒤로 알렉산드리아에서 가르친 수학자입니다. 그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습니다. 태어난 곳도 죽은 해도 모르고, 위 연표의 생몰 연도는 흔히 쓰는 어림일 뿐입니다. 가장 구체적인 증언은 700년 뒤인 5세기에 『원론』 1권의 해설을 쓴 철학자 프로클로스가 남긴 것입니다. 그는 유클리드를 프톨레마이오스 1세 시대 사람으로, 플라톤의 제자들보다 뒤이고 아르키메데스보다 앞선 사람으로 소개한 것입니다. 프로클로스는 아르키메데스가 자기 책에서 유클리드를 언급한다는 것을 그 근거로 들었는데, 이 언급조차 후대에 끼워 넣은 것이라는 의심이 있습니다. 4세기 알렉산드리아의 수학자 파포스는, 원뿔곡선(conic section) 연구로 이름난 아폴로니오스가 알렉산드리아에서 유클리드의 제자들과 함께 공부했다고 전합니다.
나이
왕이 봉급을 주는 학자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알렉산드리아에 무세이온, 곧 '무사 여신들의 전당'과 도서관을 세웠습니다. 왕실은 이곳에 모인 학자들에게 숙소와 식사와 봉급을 주었고, 도서관은 지중해 곳곳의 두루마리를 사들이고 베꼈습니다. 이집트에서 나는 파피루스는 값싼 필기 재료였습니다. 같은 시대의 풍자 시인 티몬은 이곳 학자들을 '무사 여신의 새장' 속에서 먹고 끝없이 다투는 책벌레들이라고 비꼬았다고 전합니다. 학문이 왕의 후원을 받는 직업이 된 것은 이때가 처음에 가깝습니다. 알렉산드로스의 원정 뒤 그리스어는 지중해 동부와 서아시아의 공용어가 되었으니, 알렉산드리아에서 쓴 책은 멀리까지 읽힐 수 있었습니다. 유클리드의 『원론』과 뒤이은 아르키메데스, 아폴로니오스, 에라토스테네스의 작업이 모두 이 체계 안에서 나오거나 이곳으로 보내졌습니다.
그가 남긴 『원론』은 사람보다 훨씬 잘 알려져 있습니다. 1권은 23개의 정의, 다섯 개의 공준, 다섯 개의 공통 개념(common notion)으로 시작합니다. 정의는 '점은 부분이 없는 것이다'처럼 낱말의 뜻을 정하고, 공준은 '두 점을 잇는 직선을 그을 수 있다'처럼 기하(geometry)에서 증명 없이 받아들이는 약속이며, 공통 개념은 '같은 것과 같은 것들은 서로 같다'처럼 모든 학문에 통하는 원리입니다. 나머지 명제 460여 개는 모두 이 출발점에서 논리로 이끌어 냅니다. 1–6권은 평면기하, 7–9권은 수론, 10권은 서로 공통 단위로 잴 수 없는 양(정사각형의 변과 대각선처럼, 둘 다를 정수(integer) 배로 재는 공통의 자가 없는 두 길이), 11–13권은 입체기하이고, 책은 정다면체(regular polyhedron)가 다섯 가지뿐이라는 증명으로 끝납니다. 결과의 상당수는 앞사람들의 것이었습니다. 두 양의 비가 같다는 것을 공통 단위로 잴 수 없는 양에까지 통하게 정의한 5권의 비례론(theory of proportion), 그리고 12권의 실진법(아래에서 설명)은 에우독소스에게서, 10권과 13권의 많은 부분은 플라톤과 같은 시대 아테네의 수학자 테아이테토스에게서 왔다고 봅니다. '원론'(스토이케이아, 요소들)이라는 이름의 책도 그 전에 있었습니다. 프로클로스에 따르면 기원전 5세기 키오스의 히포크라테스를 비롯한 여러 사람이 원론을 썼지만, 유클리드의 책이 나온 뒤 모두 잊혔습니다. 유클리드의 몫은 앞사람들의 결과를 몇 안 되는 출발점에서 한 줄로 이어지게 배열한 데 있습니다. 증명된 지식은 그 자체로 분명한 첫 원리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상이 가장 잘 실현된 책이 『원론』입니다.
다섯 공준 가운데 마지막 것은 유난히 깁니다. 한 직선이 두 직선과 만나 같은 쪽에 만드는 두 내각의 합이 두 직각보다 작으면 두 직선은 그쪽에서 만난다는 평행선 공준(parallel postulate)입니다. 유클리드는 1권의 처음 28개 명제를 이 공준 없이 증명하고 29번 명제에서야 처음 씁니다. 삼각형의 세 내각의 합이 두 직각이라는 32번 명제와 1권의 마지막 피타고라스 정리(47번 명제)가 이 공준에 기댑니다. 뒷사람들은 이것을 증명해야 할 정리라고 느꼈고, 2,000년 동안의 실패 끝에 19세기에 이 공준을 부정해도 모순 없는 쌍곡기하(hyperbolic geometry)가 나왔습니다.
수론을 다룬 7권은 두 수의 최대공약수(greatest common divisor)를 구하는 방법으로 시작합니다. 큰 수를 작은 수로 나눈 나머지(remainder)로 바꾸는 일을 되풀이하면 됩니다. 1071과 462라면 1071을 462로 나눈 나머지 147, 462를 147로 나눈 나머지 21, 147을 21로 나누면 나머지 0이니 최대공약수는 21입니다. 이것이 지금도 컴퓨터가 쓰는 유클리드 호제법(Euclidean algorithm)이고, 수백 자리 수의 RSA 암호(RSA cryptosystem) 열쇠를 만들 때도 이 방법을 조금 넓힌 계산을 씁니다. 9권 20번 명제는 소수(prime number)가 '주어진 어떤 개수의 소수보다도 많다'고 말합니다. 소수 몇 개를 모두 곱하고 1을 더한 수는 그 소수들 어느 것으로도 나누어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1보다 큰 수는 반드시 어떤 소수로 나누어떨어지니, 그 소수는 목록 밖에 있어야 합니다. 흔히 곱하고 1을 더한 수 자체가 소수라고 오해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2 × 3 × 5 × 7 × 11 × 13 + 1 = 30031 = 59 × 509이고, 목록 밖의 소수 59와 509가 나타납니다. '무한히 많다'가 아니라 '어떤 개수보다도 많다'라고 쓴 것은, 무한히 많은 것이 한꺼번에 다 주어진 상태(완결된 무한)를 논증에 들이지 않으려 한 그리스의 태도를 보여 줍니다(무한을 다루는 법). 9권 36번 명제는
10권은 무리수(irrational number)에 해당하는 양을 분류하고, 12권은 원 안팎에 다각형을 채워 차이를 원하는 만큼 줄이는 실진법(method of exhaustion)으로 원의 넓이(area)가 지름의 제곱에 비례함을 증명합니다. 무한을 입에 올리지 않고 극한(limit)에 다가가는 방법으로, 아르키메데스를 거쳐 적분(integral)으로 이어집니다. 6권에는 선분을 전체 대 큰 부분이 큰 부분 대 작은 부분과 같게 나누는 '외중비(extreme and mean ratio)'가 정의되는데, 오늘날의 황금비(golden ratio)이고 13권에서 정오각형과 정이십면체를 짓는 데 쓰입니다. 10권의 무리량(irrational magnitude) 분류는 1225년 레오나르도 피보나치가 어떤 3차방정식(cubic equation)의 근이 그 가운데 어느 것으로도 쓸 수 없음을 보이는 데도 쓰였습니다.
『원론』 밖의 유클리드. 그의 이름으로 전하는 책은 더 있습니다. 『자료』는 어떤 것이 주어지면 무엇이 함께 정해지는지를 따지는 책이고, 『광학』은 눈에서 나간 시선이 곧은 직선이라고 놓고 물체가 멀수록 작아 보이는 까닭을 시선이 이루는 각으로 설명하는데, 9세기 바그다드의 알킨디는 이 책을 출발점으로 삼아 시선의 이론을 고쳐 나갔습니다. 『현상』은 회전(rotation)하는 구면 위에서 별들이 뜨고 지는 모습을 기하로 다룬 천문서입니다. 도형을 정해진 비로 나누는 『도형의 분할에 관하여』는 그리스어 원문이 사라지고 아랍어 번역으로 전합니다. 네 권짜리 『원뿔곡선론』과 세 권짜리 『포리스마』는 사라졌는데, 원뿔곡선에 관해서는 한 세대 뒤 아폴로니오스의 여덟 권이 나오자 더 베껴지지 않았기 때문으로 봅니다. 틀린 증명을 모아 초보자가 속지 않게 한 『오류론』도 있었다고 프로클로스가 전합니다.
바그다드를 거쳐. 『원론』의 원본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4세기 알렉산드리아의 수학자 테온(히파티아의 아버지)이 편집한 판이 중세 그리스어 사본 대부분의 바탕이 되었고, 19세기 초 바티칸 도서관의 사본에서 그보다 앞선 판의 모습이 확인되었습니다. 8세기 말부터 9세기 초 바그다드에서는 알하자즈 이븐 유수프가 하룬 알라시드와 알마문 두 칼리프 아래서 이 책을 두 번 아랍어로 옮겼고, 9세기 후반에는 이스하크 이븐 후나인의 번역을 타비트 이븐 쿠라가 다듬었습니다(바그다드 지혜의 집). 아랍 세계의 수학자들은 평행선 공준을 증명하려고 애썼습니다. 11세기의 시인이자 수학자 오마르 하이얌, 13세기 페르시아의 천문학자 나시르 알딘 알투시가 그 시도를 남겼습니다. 알투시의 이름으로 전하는 증명은 17세기 옥스퍼드의 수학자 존 월리스가 강의에서 다루었고, 18세기 이탈리아의 조반니 사케리로 이어졌습니다. 사케리는 공준이 틀렸다고 가정해 모순을 끌어내려 했는데, 그 과정에서 사실상 쌍곡기하의 정리들을 여럿 얻고도 그것을 모순이라고 잘못 판정했습니다.
인쇄된 교과서. 12세기에 바스의 애덜라드 등이 아랍어본을 라틴어로 옮겼고, 13세기 노바라의 캄파누스가 다듬은 라틴어판이 1482년 베네치아의 라트돌트 인쇄소에서 처음 인쇄되었습니다. 여백에 도형을 찍어 넣은 이 책은 인쇄술이 수학책을 어떻게 바꿀지 보여 주었습니다. 16세기 이후 『원론』은 유럽 여러 나라 말로 옮겨져 학교 기하의 교과서가 되었고, 1847년 영국의 올리버 번은 글자 대신 색칠한 도형으로 증명을 따라가게 한 판을 펴내기도 했습니다. 1607년 베이징에서는 이탈리아의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와 명나라 관료 학자 서광계가, 리치의 스승인 예수회 수학자 클라비우스가 편집한 라틴어판을 바탕으로 앞 6권을 한문으로 옮겨 『기하원본』을 펴냈는데, 동아시아에서 쓰는 '기하'라는 말이 이 책에서 자리를 잡았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이 더 쉬운 길을 묻자 유클리드가 기하학에는 왕을 위한 길이 따로 없다고 답했다는 이야기는 프로클로스가 전하지만, 비슷한 이야기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전해져 확실하지 않습니다.
2,000년 뒤의 검사. 『원론』은 오랫동안 엄밀함의 본보기였지만, 19세기의 수학자들은 그 안의 빈틈도 찾아냈습니다. 1권 1번 명제는 두 원을 그려 정삼각형을 짓는데, 두 원이 정말 만난다는 것은 어떤 공준에서도 나오지 않습니다. 점 B가 A와 C '사이'에 있다는 개념도 그림에 기댈 뿐 정의되지 않았습니다. 1882년 독일의 모리츠 파슈가 이 '사이'에 대한 공리(axiom)를 처음 적었고, 1899년 힐베르트는 『기하학의 기초(basics)』에서 점, 직선, 평면이 무엇인지는 묻지 않고 그것들 사이의 관계만 공리로 정하는 체계를 내놓았습니다. 공리를 그 자체로 분명한 진리가 아니라 하나의 약속으로 보는 이 태도는, 평행선 공준을 부정한 기하들이 모순 없이 서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뒤에야 가능했습니다.
이어지는 곳. 평행선 공준 하나를 바꾸면 생기는 다른 기하는 쌍곡기하(평행선이 여러 개)와 구면기하(평행선이 없음)에 있고, 19세기 초 이 길을 연 사람들 가운데 가우스와 로바쳅스키가 있습니다. 정의와 공준에서 모든 것을 쌓는 『원론』의 방식은 공리와 공준(axioms and postulates)에서 따로 다룹니다. 공리 체계가 참인 문장을 모두 증명할 수 있느냐는 물음에, 자연수(natural number)의 산술을 담을 만큼 강한 체계에서는 그럴 수 없다고 답한 것이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incompleteness theorem)입니다. 반면 타르스키는 1930년 무렵(출판은 1948년) 초등 기하학의 한 공리 체계가 그런 한계 없이 완전하다는 것을 보였으니, 이 한계가 모든 공리 체계의 것은 아닙니다. 그의 이름이 붙은 개념으로는 7권의 유클리드 호제법, 그리고 『원론』의 평면에서 두 점 사이의 곧은 거리인 유클리드 거리(Euclidean distance)가 있습니다.
관계.
- 영향을 받음 아리스토텔레스 — 『원론』은 정의와 공리에서 출발해 모든 것을 증명하라는 『분석론 후서』의 요구를 가장 충실하게 실현한 책으로 꼽힙니다.
- 영향을 줌 레오나르도 피보나치 — 피보나치는 1225년 무렵 3차방정식 x³ + 2x² + 10x = 20의 근이 정수도 분수도 아닐 뿐 아니라, 『원론』 10권이 분류한 제곱근 꼴의 무리량 어느 것으로도 쓸 수 없음을 보였습니다.
- 영향을 줌 니콜라이 로바쳅스키 — 로바쳅스키는 『원론』의 평행선 공준을 부정하고도 모순 없는 기하를 1829년부터 발표했습니다.
- 영향을 줌 다비트 힐베르트 — 힐베르트의 1899년 『기하학의 기초』는 『원론』이 말없이 가정한 빈틈을 메운 공리 체계입니다.
연표.
- 기원전 305년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이집트의 왕을 칭하다
- 기원전 300년 알렉산드리아에서 『원론』 13권을 엮다(무렵)
- 기원전 282년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죽고 2세가 뒤를 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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