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타고라스(Pythagoras)
기원전 6세기 남이탈리아 크로톤에 영혼과 수를 섬기는 공동체를 세운 사모스 출신의 사상가로, 스스로 쓴 글이 없어 그의 이름이 붙은 정리와 '만물은 수'라는 생각이 어디까지 그 자신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피타고라스는 기원전 570년 무렵 에게해 동쪽 이오니아의 사모스섬에서 태어났다고 전합니다. 같은 이오니아의 밀레토스에서는 그리스 최초의 철학자로 꼽히는 탈레스와 그 뒤를 이은 사람들이 세계를 신화가 아니라 물이나 공기 같은 하나의 근원으로 설명하려 하던 때였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마흔 살 무렵, 참주(법이 아니라 실력으로 권력을 쥔 1인 통치자) 폴리크라테스가 다스리던 사모스를 떠나 남이탈리아의 그리스 식민 도시 크로톤으로 갔고, 그곳에서 제자들과 함께 엄격한 규율을 지키는 공동체를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글을 한 줄도 남기지 않았고, 그의 생애를 자세히 적은 전기들은 대부분 700–800년 뒤인 3–4세기에 쓰였습니다. 철학자들의 생애를 모은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그리고 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 철학자 포르피리오스와 이암블리코스가 그 저자들입니다. 생몰 연도도 이 전기들에서 거꾸로 짐작한 값입니다. 그래서 이 페이지는 비교적 믿을 만한 것과 후대의 전설을 나누어 적습니다.
나이
그가 떠난 세계. 기원전 6세기의 사모스는 에게해 교역으로 부유한 섬이었습니다. 폴리크라테스 무렵 이 섬에서는 산을 양쪽에서 파 들어가 한가운데서 만나게 한, 길이 1km가 넘는 수로 터널이 뚫렸습니다. 기술자 에우팔리노스의 이름이 붙은 이 터널을,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사모스 사람들이 이룬 그리스 최대의 공사 셋 가운데 첫째로 꼽았습니다. 두 방향에서 판 굴이 산속에서 만나려면 방향과 높이를 미리 맞춰야 했으니, 측량과 기하(geometry)는 이미 기술의 일부였습니다. 한편 동쪽에서는 기원전 546년 무렵 페르시아의 키루스가 리디아를 무너뜨리고 이오니아의 그리스 도시들을 차지했습니다. 많은 이오니아 사람이 서쪽으로 떠났고, 남이탈리아와 시칠리아에는 '마그나 그라이키아'(큰 그리스)라 불린 부유한 식민 도시들이 늘어서 있었습니다. 크로톤은 헤로도토스가 그리스 최고라고 적은 의사들과 올림피아 경기의 우승자들로 이름난 도시였습니다. 피타고라스가 새 공동체를 세운 곳은 그런 변경의 신흥 도시였습니다.
비교적 확실한 것. 그가 살아 있을 때나 조금 뒤에 쓰인 증언이 몇 조각 남아 있습니다. 시인 크세노파네스는 얻어맞는 강아지의 울음에서 죽은 친구의 영혼을 알아보았다는 이야기로 그를 비꼬았습니다. 영혼이 죽은 뒤 다른 몸으로 옮겨 간다는 윤회의 가르침을 겨냥한 것입니다. 만물이 흐른다고 말한 에페소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그의 박식이 참된 앎이 아니라고 깎아내렸고, 헤로도토스는 그를 그리스인 가운데 손꼽히는 지식인으로 언급했습니다. 이런 증언들로 보면 그가 이름난 인물이었고, 영혼의 윤회를 가르쳤으며, 먹는 것과 생활을 규율하는 공동체를 이끌었다는 것까지는 대체로 받아들여집니다. 그 공동체는 크로톤의 정치에도 힘을 가졌다가 반발을 샀고, 피타고라스는 메타폰툼으로 옮겨 그곳에서 죽었다고 전합니다. 그가 이집트와 바빌론에서 배웠다는 이야기는 기원전 4세기 초 아테네의 연설가 이소크라테스가 이집트 여행을 언급한 것이 가장 이르고, 뒤의 전기로 갈수록 그가 들렀다는 나라가 늘어납니다.
수의 학파. 수학과의 연결은 대부분 그를 따른 사람들, 곧 피타고라스 학파의 것입니다. 기원전 4세기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른바 피타고라스 학파'가 수의 원리를 만물의 원리로 여겼다고 전하면서도, 피타고라스 개인에게 무엇을 돌릴지는 조심스러워했습니다. 학파는 수를 홀수와 짝수로 나누고, 점을 삼각형 모양으로 늘어놓은 1, 3, 6, 10 같은 도형수(figurate number)를 따졌으며, 자기를 뺀 약수(divisor)의 합이 자기와 같은 완전수(6 = 1 + 2 + 3, 28 = 1 + 2 + 4 + 7 + 14)에 종교적 의미를 얹었습니다. 가장 오래 남은 것은 음악입니다. 같은 세기로 당긴 줄을 길이만 바꾸어 튕겨 보면, 길이를 절반으로 하면 한 옥타브(낮은 '도'에서 높은 '도'까지), 3분의 2로 하면 완전5도(도에서 솔까지), 4분의 3으로 하면 완전4도(도에서 파까지) 높은 소리가 납니다. 귀에 어울리는 소리가 작은 정수(integer)의 비라는 사실은 '만물은 수'라는 믿음을 떠받쳤습니다. 왜 그런지는 훨씬 뒤에 밝혀졌습니다. 소리의 높이는 줄이 1초에 떠는 횟수, 곧 진동수(frequency)가 정하고, 줄 길이가 절반이면 진동수가 두 배가 됩니다. 이 설명은 18세기에 떨리는 줄의 움직임을 적은 파동방정식(wave equation)에 와서야 완성되었습니다. 튕긴 줄은 한 가지 진동수만이 아니라 그 2배, 3배, 4배… 되는 진동수의 소리(배음, overtone)를 함께 내는데, 소리를 이런 배음들의 합으로 나누어 적는 방법이 푸리에 급수(Fourier series)입니다. 옥타브와 5도가 잘 어울리는 것도 두 소리의 배음이 많이 겹치기 때문입니다. 피타고라스가 대장간 망치 소리에서 이 비율을 알아냈다는 이야기는 후대의 전설이고 물리적으로도 맞지 않습니다.
정리는 그의 것일까. 직각삼각형(right triangle)의 두 변 위 정사각형 넓이(area)의 합이 빗변(hypotenuse) 위 정사각형의 넓이와 같다는 피타고라스 정리(Pythagorean theorem)는 그보다 1,000년 넘게 앞서 바빌로니아에서 쓰이고 있었습니다. 기원전 1800년 무렵의 점토판 YBC 7289(예일 대학 소장품 번호)에는 정사각형의 대각선이 변의 1;24,51,10배라고 적혀 있습니다.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60진법(sexagesimal)을 썼으니, 이것은
후대의 전설. 정사각형의 대각선과 변의 비가 어떤 정수의 비로도 쓸 수 없다는 발견, 곧 무리수(irrational number)의 발견은 기원전 5세기 무렵 그리스에서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학파 밖에 누설한 학파의 일원 히파소스가 바다에 빠져 죽었다는 이야기는 여러 판본이 서로 어긋나는 후대의 전설입니다. 콩밭을 밟지 않으려다 적에게 붙잡혀 죽었다는 최후, '철학'이라는 말을 처음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피타고라스는 죽은 뒤 수백 년 동안 신비로운 현자의 상징이 되었고, 전설은 그 상징에 계속 덧붙여졌습니다.
학파의 후예들. 공동체는 기원전 5세기 중엽 남이탈리아 곳곳에서 일어난 반발로 흩어졌지만, 그 생각은 제자들의 제자들을 통해 이어졌습니다. 필롤라오스는 학파에서 처음으로 책을 쓴 사람으로 전하며,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가만히 있지 않고 '중심의 불' 둘레를 돈다는 우주를 그렸습니다. 기원전 4세기 타렌툼의 아르키타스는 도시를 이끈 정치가이자 수학자로, '정육면체 두 배로 만들기' 문제를 풀었습니다. 주어진 정육면체보다 부피가 꼭 두 배인 정육면체의 한 변, 곧 원래 변의
다시 살아난 이름. 서기 1–2세기에는 피타고라스를 신성한 현자로 받드는 신피타고라스주의(Neopythagoreanism)가 일었습니다. 그 가운데 게라사의 니코마코스가 쓴 『산술 입문』은 홀수와 짝수, 완전수(perfect number), 도형수를 증명 없이 풍부한 예로 풀어 놓은 책인데, 보에티우스가 라틴어로 옮겨 다듬은 뒤 1,000년 가까이 유럽의 산술 교과서가 되었습니다. 16세기에 태양 중심의 우주를 편 코페르니쿠스는 『천구의 회전(rotation)에 관하여』에서 지구가 움직인다고 말한 옛사람으로 피타고라스 학파의 필롤라오스를 들었습니다. 1619년 케플러는 『세계의 조화』에서 행성들의 빠르기 사이에 음정의 비를 찾다가, 바로 그 책에서 행성 운동의 셋째 법칙을 발표했습니다. 행성이 태양을 한 바퀴 도는 시간(공전 주기(period))의 제곱은 궤도(orbit) 크기(궤도 긴반지름)의 세제곱에 비례한다는 법칙입니다. 화성의 궤도 긴반지름은 지구의 약 1.524배이니, 공전 주기는
자연을 수로 적을 수 있다는 생각도 그의 이름과 함께 살아남았습니다. 플라톤은 그 생각을 이어받아 우주를 짓는 기본 입자들을 정다면체(regular polyhedron)로 그렸고, 17세기의 갈릴레이는 자연이라는 책이 수학의 언어로 쓰였다고 말했습니다. 갈릴레이의 아버지 빈첸초 갈릴레이가 음악가로서 줄의 길이와 장력을 실험하며 피타고라스 학파의 비율을 다시 따졌다는 것도 우연만은 아닙니다. 작은 정수의 비라는 소박한 발견에서 파동과 진동수로 소리를 설명하는 물리학까지는 2,000년이 넘는 길이었습니다.
이어지는 곳. 정리 자체는 피타고라스 정리에서, 좌표로 옮긴 거리는 유클리드 거리(Euclidean distance)에서, 원 위에서의 모습은 피타고라스 항등식(Pythagorean identity)에서 볼 수 있습니다. 정수 변의 직각삼각형은 피타고라스 세 쌍, 대각선이 분수가 되지 않는 이유는 무리수에 있습니다. 학파가 신비롭게 여긴 완전수는 유클리드가 『원론』 9권에서 짝수 완전수를 만드는 방법을 증명하면서 수학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학파에 대한 가장 믿을 만한 옛 증언을 남긴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이고, 수와 무한에 대한 그리스의 태도도 그에게서 정리되었습니다. 음정의 비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소리를 진동수의 합으로 나누는 푸리에 급수로 이어집니다.
관계.
- 영향을 줌 아리스토텔레스 —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 1권에서 '이른바 피타고라스 학파'가 수를 만물의 원리로 삼았다고 소개하고 비판했는데, 이것이 학파에 대한 가장 믿을 만한 옛 증언입니다.
- 영향을 줌 유클리드 — 『원론』 9권 36번 명제는 피타고라스 학파가 신비롭게 여긴 완전수를 만드는 방법을 증명으로 주었습니다.
- 영향을 줌 갈릴레오 갈릴레이 — 갈릴레이는 『새로운 두 과학』 첫째 날 대화에서 피타고라스 학파의 줄 길이 비 2:1, 3:2를 진동수의 비로 다시 설명했습니다.
연표.
- 기원전 546년 페르시아의 키루스가 리디아를 무너뜨리고 이오니아의 그리스 도시들을 차지하다
- 기원전 532년 폴리크라테스가 다스리는 사모스를 떠났다고 전하다
- 기원전 530년 남이탈리아 크로톤에 자리 잡고 공동체를 이끌다(전승)
- 기원전 510년 크로톤이 이웃 도시 시바리스를 무너뜨리다
- 기원전 500년 크로톤의 반발을 피해 메타폰툼으로 옮겼다고 전하다
이 인물이 나오는 긴 글
이 인물을 언급하는 페이지
- 피타고라스 정리
… 덕분입니다. 그 공준을 버린 구면기하나 쌍곡기하에서는 이 정리도 바뀝니다. 이름은 기원전 6세기 그리스의피타고라스에서 왔지만, 그가 직접 증명했는지는 전해지는 이야기일 뿐 확실하지 않습니다. 이 관계를 만족하는 정수 …
- 무리수
… 그런 짝이라는 것, 다시 말해 √2가 분수가 아니라는 것은 기원전 5세기 무렵 그리스에서 알려졌고,피타고라스학파와 관련된 일로 전합니다. 이 비밀을 누설한 히파소스가 바다에 빠져 죽었다는 이야기는 판본마다 어긋나는 …
- 수 체계: 자연수에서 실수까지
… = 2를 만족하는데, 어떤 분수도 이 식을 풀지 못합니다(증명은 무리수에). 이 사실은 기원전 5세기 무렵피타고라스학파 안에서 알려졌다고 전해지고, 기원전 4세기의 에우독소스는 분수로 나타낼 수 없는 길이의 비까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