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 개념 지도
인물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

집합론⁠(set theory)⁠의 역설을 찾아내고 화이트헤드와 『수학 원리』를 써서 수학을 논리 위에 세우려 한 영국의 논리학자이자 철학자. 평화 운동가이자 노벨 문학상 수상자.

R={ x∣x∉x }  ⟹  (R∈R  ⟺  R∉R)R = \{\, x \mid x \notin x \,\} \;\Longrightarrow\; \bigl(R \in R \iff R \notin R\bigr)

버트런드 러셀은 1872년 웨일스의 트렐렉에서 귀족 집안에 태어났습니다. 할아버지 존 러셀은 두 차례 영국 총리를 지낸 정치가였고, 일찍 부모를 여읜 그는 할머니 손에서 자랐습니다. 자서전에 따르면 열한 살 때 형에게 유클리드 기하⁠(geometry)⁠를 배운 일이 첫사랑처럼 눈부신 사건⁠(event)⁠이었지만, 공리⁠(axiom)⁠는 증명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에는 쉽게 수긍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1890년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에 들어간 그가 평생 붙든 물음, 곧 수학의 확실성은 어디서 오는가가 여기서 시작됩니다. 19세기 말은 칸토어가 무한을 집합⁠(set)⁠으로 다루기 시작하고, 독일의 고틀로프 프레게와 이탈리아의 주세페 페아노가 산술을 몇 개의 논리 법칙과 공리로 적으려 하던 때였습니다.

굵은 막대가 이 사람의 생애이고, 흰검은 점은 페이지 끝 연표에 적은 일들입니다. 가는 막대는 같은 시대를 산 이 위키의 인물들입니다. 나이를 끌어 보세요.

나이 세 ·

그가 들어간 케임브리지는 수학 졸업 시험 트라이포스의 등수가 신문에 실릴 만큼 경쟁이 치열했지만, 그 시험은 새로운 수학보다 잘 정해진 문제를 빨리 푸는 요령을 겨루는 것이었습니다. 1893년 그는 일곱째 성적으로 수학을 마쳤고, 이듬해 도덕과학, 곧 철학 시험에서 최우등을 받았습니다. 그의 입학 장학 시험 답안을 읽고 눈여겨본 젊은 수학자 화이트헤드의 추천으로, 그는 1892년 비밀 토론 모임 '사도들'의 회원이 되었습니다. 이 모임에서 만난 철학자 G. E. 무어와 함께 그는 1898년 무렵 당시 영국 철학을 지배하던 헤겔식 관념론, 곧 세계 전체를 하나의 정신적 통일체로 보는 철학을 버리고, 명제를 잘게 쪼개어 따지는 분석의 길로 돌아섰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분석 철학이라 불리는 전통의 한 출발점입니다. 1900년에는 라이프니츠에 관한 책을 냈는데, 모든 추론을 기호의 계산으로 바꾸자던 라이프니츠의 꿈은 곧 그 자신의 계획이 되었습니다.

1900년 파리 국제철학대회에서 페아노의 정확한 기호 논리⁠(symbolic logic)⁠를 접한 그는, 수학 전체를 순수한 논리에서 이끌어 낼 수 있다는 논리주의(수학 기초론 논쟁⁠(debate on the foundations of mathematics)⁠)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듬해 칸토어의 대각선 논법⁠(diagonal argument)⁠을 '모든 집합의 집합'에 적용해 보다가 모순에 부딪혔습니다. 칸토어의 정리에 따르면 어떤 집합도 자기의 멱집합⁠(power set)⁠보다 작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담은 집합은 자기 멱집합의 원소⁠(element)⁠들까지 모두 담으니 그보다 작을 수 없고, 따라서 그런 집합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 증명을 따라가면 위의 식의 집합 RR, 곧 '자기 자신을 원소로 갖지 않는 집합들의 집합'이 나옵니다. RR이 자기 원소라면 정의에 따라 원소가 아니고, 원소가 아니라면 정의에 따라 원소입니다(러셀의 역설⁠, Russell's paradox⁠). 어떤 성질이든 그 성질을 가진 것들을 모으면 집합이 된다는, 누구나 당연하게 여긴 원리가 무너진 것입니다. 1902년 6월 그가 이 모순을 편지로 알리자, 산술을 논리 위에 세우던 프레게는 자기 체계의 토대가 흔들렸다고 답했습니다. 이듬해 펴낸 『수학의 원리』에서 러셀은 역설을 공개하면서 프레게의 체계를 소개하는 부록을 붙였는데, 거의 읽히지 않던 예나의 이 논리학자가 영어권에 알려지는 데 이 부록이 큰 몫을 했습니다.

러셀의 해법은 집합에 층을 두는 것이었습니다. 맨 아래에 개체가 있고, 그 위에 개체들의 집합, 그 위에 집합들의 집합이 있습니다. 집합은 자기보다 낮은 층의 것만 원소로 가질 수 있으니 'x∈xx \in x'는 참도 거짓도 아닌, 문법에 맞지 않는 말이 됩니다. 푸앵카레가 역설의 원인으로 지목한 자기 순환적 정의를 막는 장치이기도 했습니다. 이 타입 이론⁠(type theory)⁠ 위에서 그는 옛 스승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와 함께 1910년부터 1913년까지 세 권의 『수학 원리』를 썼습니다. 1 + 1 = 2가 2권에 가서야 증명될 만큼 신중한 책이었고, 두 저자는 출판비 일부를 직접 댔습니다. 이 체계의 복잡한 부분은 뒤에 램지가 단순하게 고쳤고, 층을 나누는 생각은 람다 계산⁠(lambda calculus)⁠의 타입(단순 타입 람다 계산⁠, simply typed lambda calculus⁠)과 오늘날 프로그래밍 언어의 자료형 검사로 이어졌습니다.

『수학 원리』가 목표한 완전한 체계는 1931년 괴델의 논문으로 불가능해졌습니다. 그 논문의 제목 자체가 「『수학 원리』와 관련 체계의 형식적으로 결정 불가능한 명제들에 대하여」였습니다. 결정 불가능한 명제란 그 체계 안에서 참이라고도 거짓이라고도 증명할 수 없는 명제입니다(불완전성 정리⁠, incompleteness theorem⁠). 그래도 이 책은 논리를 수학의 정밀한 언어로 만들었고, 불에게서 시작된 기호 논리(불 대수⁠, Boolean algebra⁠)를 20세기 논리학과 컴퓨터 과학의 공용어로 키웠습니다. 1905년의 논문 「지시에 대하여」에서는 '지금의 프랑스 왕은 대머리다' 같은 문장을 '그런 사람이 꼭 한 명 있고, 그가 대머리다'로 풀어 읽는 분석을 내놓아 언어철학의 출발점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1911년에는 오스트리아의 젊은 공학도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 그를 찾아와 제자가 되었습니다.

맨체스터에서 항공 공학을 공부하던 비트겐슈타인은 프레게의 권유로 케임브리지에 왔고, 러셀은 몇 달 만에 이 청년이 자기 뒤를 이을 사람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1913년 비트겐슈타인이 러셀이 쓰던 판단의 이론 원고를 날카롭게 비판하자, 러셀은 그 원고를 끝내 출판하지 못했고 1916년의 편지에서는 이 일로 다시는 철학의 근본적인 연구를 해낼 수 없으리라 느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그는 이탈리아의 포로수용소에 있던 비트겐슈타인이 보내온 『논리철학 논고』의 출판을 도왔고 1922년 영어판에 서문을 썼지만, 비트겐슈타인은 그 서문이 자기 책을 오해했다고 불만스러워했습니다. 그 번역 초고를 만든 사람이 열여덟 살의 램지였습니다. 러셀과 무어, 비트겐슈타인, 그리고 사도들의 동료였던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서로의 원고를 읽고 비판하던 이 좁은 세계에서, 20세기 전반 논리학과 철학의 큰 물줄기가 여럿 흘러나왔습니다.

그의 삶은 논리학 밖으로도 크게 뻗었습니다. 1차 세계대전 중 징병 반대 운동으로 1916년 트리니티 칼리지의 강사직을 잃었고, 1918년에는 반전 글 때문에 여섯 달 형을 받아 브릭스턴 감옥에 갇혔고(9월에 풀려났습니다), 그 안에서 『수리 철학 입문』을 썼습니다. 1912년의 『철학의 문제들』에서는 날마다 모이를 주던 사람이 어느 날 목을 비트는 닭의 비유로 귀납의 한계를 설명했습니다. 본 자료에서 찾은 규칙이 보지 않은 경우에도 통한다는 보장이 어디서 오느냐는 이 물음은 오늘날 기계 학습⁠(machine learning)⁠의 과적합⁠(overfitting)⁠ 논의에서도 되살아납니다. 1940년에는 결혼과 도덕에 관한 견해 때문에 뉴욕 시립 대학의 교수 임용이 법원 판결로 취소되기도 했습니다.

두 대전 사이에 그는 강연과 글로 먹고사는 공적 지식인이 되었습니다. 1920년 소비에트 러시아를 찾아가 레닌을 만난 뒤에는 볼셰비키 체제의 폭력과 독선을 비판하는 책을 써서 좌파 친구들을 실망시켰고, 같은 해 가을부터 이듬해까지 베이징 대학에서 강의하며 5·4 운동 뒤 새 학문을 찾던 중국 지식인들에게 논리학과 서양 철학을 소개했습니다. 1927년에는 아내 도라와 함께 아이들의 자유를 존중하는 실험 학교를 열었고, 1931년 형이 죽자 러셀 백작 작위를 이었습니다. 1차 세계대전 때 평화주의자였던 그는 히틀러 앞에서 그 입장을 거두고 2차 세계대전을 지지했고, 1944년 트리니티 칼리지로 돌아왔습니다. 강의 원고에서 나온 『서양 철학사』(1945)는 널리 팔려 그의 생계를 오래 떠받쳤습니다.

히로시마 이후 그의 마지막 30년은 핵무기와의 싸움이었습니다. 1950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고, 1955년 아인슈타인과 함께 핵전쟁의 위험을 경고하는 러셀–아인슈타인 선언을 발표했습니다. 이 선언에서 1957년 동서 진영의 과학자들이 만나는 퍼그워시 회의가 시작되었고, 1958년에는 핵군축 운동의 첫 회장을 맡았습니다. 여든아홉 살이던 1961년에도 핵무기 반대 시위로 일주일 동안 감옥에 갇혔고, 1960년대 후반에는 베트남 전쟁의 전쟁 범죄를 조사하는 민간 법정을 조직했습니다. 1970년 아흔일곱 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논리학자로서의 그의 유산은 뜻밖의 곳에서도 이어졌습니다. 1956년 컴퓨터 과학자 앨런 뉴얼과 허버트 사이먼의 프로그램 '논리 이론가'는 『수학 원리』 둘째 장의 앞쪽 정리 52개 가운데 38개를 스스로 증명했고, 그 가운데 하나는 원래의 증명보다 짧았습니다. 소식을 들은 러셀은 이를 반기는 편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의 초기 대표 성공 사례가 그의 책 위에서 나온 셈입니다. 한편 그의 역설이 드러낸 자기 참조⁠(self-reference)⁠의 구조는 괴델과 튜링을 거쳐 계산의 한계를 보이는 표준 도구가 되었습니다(자기 참조와 대각선).

이어지는 곳. 자기 자신에 대해 묻고 답을 뒤집는 러셀의 역설의 모양은 대각선 논법, 괴델의 문장, 튜링의 정지 문제⁠(halting problem)⁠에 똑같이 나타납니다. 역설을 피하는 오늘날의 표준 방법은 타입⁠(type)⁠ 대신, 1908년 체르멜로가 처음 적은 것처럼 집합을 만드는 규칙을 공리로 제한하는 공리적 집합론입니다. 그 공리들 위에서 괴델(1940)과 폴 코언(1963)은 연속체 가설⁠(continuum hypothesis)⁠을 증명할 수도 반증할 수도 없다는 것, 곧 그 독립성을 보였습니다. 산술 전체를 형식 체계⁠(formal system)⁠로 적으려던 같은 시대의 다른 계획은 힐베르트의 형식주의입니다.

관계.

가운데가 이 사람, 둘레가 이어진 인물들입니다. 선의 색은 관계의 종류(초록 스승·제자, 파랑 함께 연구, 보라 편지, 빨강 논쟁, 주황 영향)이고, 다른 인물의 페이지에 적힌 관계도 함께 모았습니다.

  • 영향을 받음 게오르크 칸토어 — 칸토어의 대각선 논법⁠(Cantor's diagonal argument)⁠을 '모든 집합의 집합'에 적용해 보다가 러셀의 역설에 부딪혔습니다.
  • 영향을 받음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 — 1900년 라이프니츠의 철학을 다룬 책을 쓰며, 모든 추론을 계산으로 바꾸려던 그의 논리학의 꿈을 되살렸습니다.

연표.

  • 1890년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에 들어가다
  • 1892년 토론 모임 '사도들'의 회원이 되다
  • 1893년 수학 졸업 시험에서 일곱째 성적을 얻다
  • 1900년 파리 국제철학대회에서 페아노를 만나다
  • 1901년 집합론의 역설을 발견하다
  • 1902년 프레게에게 역설을 알리는 편지를 보내다
  • 1903년 『수학의 원리』를 펴내다
  • 1905년 「지시에 대하여」를 발표하다
  • 1910년 화이트헤드와 『수학 원리』 첫 권을 펴내다
  • 1911년 비트겐슈타인이 찾아와 제자가 되다
  • 1916년 반전 운동으로 트리니티 칼리지 강사직을 잃다
  • 1918년 반전 글 때문에 여섯 달 형을 받고 감옥에 갇히다
  • 1920년 소비에트 러시아를 방문하고 중국 베이징에서 강의하다
  • 1927년 아내 도라와 비컨힐 학교를 열다
  • 1945년 『서양 철학사』를 펴내다
  • 1950년 노벨 문학상을 받다
  • 1955년 러셀–아인슈타인 선언을 발표하다
  • 1958년 핵군축 운동의 첫 회장이 되다
  • 1961년 핵무기 반대 시위로 일주일 동안 감옥에 갇히다
관련된 시대와 장소괴팅겐20세기 초 케임브리지
이 개념이 나오는 큰 생각무한을 다루는 법자기 참조와 대각선

이 인물이 나오는 긴 글

집합론 무한에도 크기가 있다 자연수와 짝수는 어느 쪽이 많을까? 칸토어는 무한을 세는 법을 찾았고, 무한이 하나가 아님을 보였다. 그래프 이론 일곱 다리의 도시 쾨니히스베르크의 일곱 다리를 한 번씩만 건너 산책할 수 있을까? 오일러는 지도를 지우고 점과 선만 남겼다. 통계와 인과 담배와 폐암 상관관계는 인과관계가 아니라고들 한다. 그렇다면 담배가 폐암을 일으킨다는 것은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계산 이론 기계가 풀 수 없는 문제 모든 수학 문제를 기계적으로 풀 수 있을까? 러셀의 역설에서 괴델과 튜링까지,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니오'였고, 그 증명이 컴퓨터를 낳았다. 램지 이론 완전한 무질서는 없다 여섯 명이 모이면 서로 아는 세 사람이나 서로 모르는 세 사람이 반드시 있다. 충분히 크면 어디에나 질서가 숨어 있다는 이론과, 그것을 동전 던지기로 증명한 에르되시. 정보 이론과 압축 짧게 보내기 모스 부호는 왜 E를 점 하나로 보낼까? 섀넌의 엔트로피가 정한 압축의 한계와, 허프만 부호에서 JPEG까지 그 한계에 다가간 방법들. 신경망과 기계 학습 배우는 기계 예를 보여 주면 규칙을 스스로 찾는 기계. 1958년의 퍼셉트론에서 오늘의 심층 신경망까지, 그 밑바닥에는 미분과 연쇄법칙이 있다. 타입 이론과 범주론 증명은 프로그램이다 러셀의 역설을 막으려던 '타입'이 프로그램의 실수를 막는 장치가 되었다. 명제를 타입으로, 증명을 프로그램으로 읽으면 둘이 규칙 하나하나까지 맞아떨어진다. 오늘날 수학자들은 그 사실로 컴퓨터에게 증명을 검사받는다. 수학의 오류 틀린 증명이 만든 수학 틀린 증명은 흔하다. 드물게, "정확히 어디가 틀렸는가"라는 물음이 새 분야를 낳는다. 코시의 합 정리와 균등 수렴, 라메의 증명과 아이디얼, 켐프의 사슬, 푸앵카레의 회수된 논문과 혼돈, 프레게의 법칙과 러셀의 편지, 보예보츠키와 증명 보조기까지. 오류는 대개 서로 다른 두 가지를 하나로 여긴 자리에 있었다. 불가능성 정리 불가능의 증명 각의 삼등분, 5차방정식의 근의 공식, 모든 파일을 줄이는 압축, 멈춤을 판정하는 프로그램, 공정한 투표 규칙. 없다는 것은 어떻게 증명할까? 서로 먼 분야의 불가능성 증명들은 거의 모두 불변량, 세기, 대각선이라는 세 가지 무기 가운데 하나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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