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라토스테네스(Eratosthenes of Cyrene)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이끌며 막대의 그림자로 지구 둘레를 재고, 소수(prime number)를 거르는 체와 기준선을 그은 세계 지도에 이름을 남긴 키레네 출신의 학자.
에라토스테네스는 기원전 276년 무렵 오늘날 리비아 동부의 그리스 도시 키레네에서 태어났습니다. 생몰 연도는 10세기의 사전 『수다』 같은 후대 기록에서 짐작한 것이라 몇 해씩 어긋날 수 있습니다. 아테네에서 철학을 공부한 뒤 기원전 245년 무렵 이집트의 왕 프톨레마이오스 3세의 부름을 받아 알렉산드리아로 갔고, 왕자의 스승이자 도서관의 책임자가 되었습니다. 그 무렵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지중해 세계의 두루마리를 모으는 곳이었고, 원정대와 상인, 측량사가 적어 온 거리와 여정도 그곳에 쌓였습니다. 그것들을 한 장의 지도로 엮으려면 먼저 지구가 얼마나 큰지 알아야 했습니다.
나이
세계의 두루마리를 모으는 곳.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책을 모으는 데 거의 집착했습니다. 2세기의 의사 갈레노스는 알렉산드리아 항구에 들어온 배에서 책을 찾아내 베끼고 원본은 도서관에 두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프톨레마이오스 3세가 아테네에서 3대 비극 작가의 공식 대본을 막대한 보증금을 걸고 빌린 뒤 보증금을 포기하고 원본을 차지했다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앞선 세대의 시인 칼리마코스는 이 두루마리들을 분야와 저자별로 정리한 목록 『피나케스』를 만들었고, 『수다』는 에라토스테네스를 칼리마코스의 제자라고 적었습니다. 파피루스 조각에 남은 도서관장 명단에 따르면 그는 서사시 『아르고나우티카』를 쓴 로도스의 아폴로니오스에 이어 도서관을 맡았습니다. 무세이온의 도서관장은 대개 시인과 문헌학자가 맡는 자리였는데, 그 자리에 수학과 지리에 밝은 사람이 앉은 것입니다.
지구를 재다. 남쪽 도시 시에네(오늘날의 아스완)에서는 하짓날 정오에 해가 머리 바로 위에 옵니다. 같은 시각 북쪽의 알렉산드리아에서는 똑바로 세운 막대가 짧은 그림자를 드리웁니다. 해는 아주 멀리 있으니 두 도시에 닿는 햇빛은 평행하다고 볼 수 있고, 막대는 지구 중심을 향해 서 있습니다. 평행한 두 직선을 다른 직선 하나가 비스듬히 가로지르면, 그 직선의 양쪽에 엇갈려 생기는 두 각(엇각, alternate angles)은 크기가 같습니다(평행선 공준(parallel postulate)에서 나오는 사실). 여기서 평행한 두 직선은 두 도시에 닿는 햇빛이고, 가로지르는 직선은 알렉산드리아의 막대를 지구 중심까지 늘인 선입니다. 그래서 알렉산드리아에서 막대와 햇빛이 이루는 각은, 지구 중심에서 두 도시가 벌어진 각과 같습니다. 천문학 입문서를 쓴 후대의 클레오메데스가 전하는 바로는 그 각이 원의 50분의 1(7.2°), 두 도시 사이가 5,000스타디온(stadion)이었고, 따라서 둘레는
가정은 몇 개였나. 이 측정은 여러 가정 위에 서 있습니다. 시에네가 알렉산드리아의 정남쪽에 있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동쪽으로 경도 3°쯤 어긋나고, 하짓날 해가 정확히 머리 위에 와야 하는데, 시에네는 북회귀선(하짓날 정오에 해가 머리 바로 위에 오는 가장 북쪽 위도, 북위 약 23.4°)에서 조금 북쪽입니다. 두 도시 사이의 거리를 어떻게 얻었는지는 기록이 없어, 왕실의 측량 기록이나 걸음 수로 거리를 재던 사람들의 자료였으리라는 추측만 있습니다. 여러 오차가 서로 상쇄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지리학자 스트라본과 로마의 박물학자 플리니우스는 그의 값을 252,000스타디온으로 전하는데, 원을 60이나 360으로 나눈 단위로 나누어떨어지게 다듬은 값이라는 해석이 있습니다. 결과가 우연히 잘 맞았는지를 떠나, 직접 잴 수 없을 만큼 큰 것을 작은 각도와 짧은 거리로 옮겨 재고 그 가정들을 하나씩 따져 보는 이 방식은 근사와 오차를 다루는 과학의 전형이 되었습니다.
작아진 지구. 그의 값이 곧바로 정설이 된 것은 아닙니다. 한 세기쯤 뒤의 스토아 철학자 포세이도니오스는 다른 방법으로 지구 둘레를 어림했고, 스트라본은 그와 관련된 값으로 180,000스타디온을 전합니다. 2세기 알렉산드리아의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는 『지리학』에서 이 작은 값을 받아들였고, 이 책이 15세기 초 라틴어로 옮겨져 르네상스 유럽의 지도를 다시 그리게 했습니다. 콜럼버스가 서쪽으로 가면 아시아가 가깝다고 믿은 데에는 이런 작은 지구의 어림이 한몫했다고 봅니다. 에라토스테네스의 더 큰 값이 옳았다는 것은 대서양 건너에 뜻밖의 대륙이 있다는 사실과 함께 드러난 셈입니다.
체. 소수를 찾는 가장 오래된 방법에 그의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2부터 차례로 적은 수에서, 아직 지워지지 않은 가장 작은 수를 소수로 확정하고 그 배수(multiple)를 모두 지웁니다. 이것을 되풀이하면 소수만 남습니다. 소수가 아닌 수(합성수, composite number)
지도와 연대. 그는 『지리학』 세 권에서 로도스를 지나는 동서의 기준선과 알렉산드리아, 시에네, 메로에를 지나는 남북의 기준선을 긋고 그 위에 사람이 사는 세계를 배치했습니다. 위도와 경도로 짠 격자의 선구입니다. '지리학'(게오그라피아, 땅을 그리기)이라는 말을 처음 쓴 사람으로도 꼽힙니다. 그의 지리학은 뒤에 천문학자 히파르코스가 책 한 권을 들여 비판할 만큼 영향력이 컸고, 그 내용은 대부분 스트라본의 『지리지』 속 인용과 반박으로 전합니다. 트로이 전쟁부터 알렉산드로스까지 사건(event)들의 연대를 맞추는 연대학도 그의 일이었는데, 트로이 함락을 오늘날의 기원전 1184/1183년에 놓은 그의 연대는 고대 내내 표준으로 쓰였습니다. 델로스 문제(Delian problem)를 위한 기구도 만들었습니다. 델로스 문제는 부피가 두 배인 정육면체의 변, 곧 원래 변의
시인이자 문헌학자. 그는 스스로를 '필롤로고스'(말과 배움을 사랑하는 사람)라 부른 첫 사람이라고 전합니다. 옛 아테네 희극을 연구한 여러 권의 책을 썼고, 신화 속 인물들이 별자리가 된 이야기를 모은 책(요약본만 남음)과 신 헤르메스를 노래하며 천구와 기후대를 묘사한 시도 지었습니다. 『플라토니코스』라는 책에서는 플라톤의 대화편에 나오는 수학, 곧 비례와 평균(mean)과 음악의 비율을 풀이했다고 뒷사람들이 인용합니다. 한 사람 안에 시와 문헌학과 수학이 함께 있는 것은 무세이온의 학풍 그 자체였습니다.
그는 거의 모든 분야를 두루 다뤘지만 어느 분야에서도 으뜸은 아니라는 뜻으로 '베타'(둘째)라고 불렸고, 여러 종목을 두루 하는 운동선수라는 뜻의 '펜타틀로스'라는 별명도 있었다고 전합니다. 그러나 아르키메데스는 도형을 저울에 달아 답을 찾는 자신의 비밀스러운 방법을 담은 『방법』을 바로 그에게 보냈습니다. 그것을 이해하고 평가할 사람으로 그를 꼽았다는 뜻입니다. 늙어 눈이 멀자 스스로 음식을 끊어 죽었다는 이야기가 『수다』에 전하지만 확실하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곳. 체는 소수의 분포를 따지는 첫걸음이고, 소수가 얼마나 흔한지는 소수 정리(prime number theorem)가, 큰 수가 소수인지 빠르게 가리는 방법은 소수 판정(primality test)이 다룹니다. 그림자로 지구를 잰 논증의 핵심인 '호의 길이는 중심각에 비례한다'는 단위원(unit circle)과 라디안에서, 둥근 지구 위 두 도시 사이의 거리는 하버사인 공식과 곡면 위의 가장 짧은 길을 다루는 측지선(geodesic)에서 이어집니다. 그 논증이 기댄 평행선의 성질은 한 세대 앞서 같은 도시에서 『원론』을 엮은 유클리드에게서 왔습니다.
관계.
- 편지 아르키메데스 — 아르키메데스가 알렉산드리아의 학자들에게 풀어 보라며 보낸 '소 떼 문제'(태양신의 소 떼가 몇 마리인지 여러 조건에서 구하는 문제로, 가장 작은 답도 20만 자리가 넘는 수)는 에라토스테네스 앞으로 된 편지에 담겨 전합니다.
연표.
- 기원전 260년 아테네에서 철학을 공부하다(무렵)
- 기원전 245년 프톨레마이오스 3세의 부름을 받아 알렉산드리아로 가다(무렵)
- 기원전 240년 하짓날 정오의 그림자로 지구의 둘레를 재다(무렵)
- 기원전 221년 그가 가르쳤다고 전하는 프톨레마이오스 4세가 왕위에 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