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 개념 지도
인물

리하르트 데데킨트(Richard Dedekind)

실수⁠(real number)⁠를 유리수⁠(rational number)⁠의 절단⁠(cut)⁠으로 정의하고, 자연수⁠(natural number)⁠를 집합⁠(set)⁠과 사상으로 세우고, 아이디얼⁠(ideal)⁠로 정수론⁠(number theory)⁠을 다시 쓴 독일의 수학자.

2  ↔  A={ r∈Q:r≤0 or r2<2 },B=Q∖A\sqrt{2} \;\leftrightarrow\; A = \{\, r \in \mathbb{Q} : r \le 0 \ \text{or}\ r^2 \lt 2 \,\},\quad B = \mathbb{Q} \setminus A

리하르트 데데킨트는 1831년 독일 브라운슈바이크 공국의 수도 브라운슈바이크에서, 카롤리눔 학교의 법학 교수 집안의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가우스가 태어난 바로 그 도시입니다. 그의 시대 해석학⁠(mathematical analysis)⁠은 실수를 당연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수직선 위의 점이 곧 실수이고, 수직선에는 빈틈이 없다는 그림의 직관이 모든 증명의 바닥에 깔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리수⁠(irrational number)⁠가 정확히 무엇인지 정의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정수론에서는 쿰머가 고차의 상호 법칙과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Fermat's Last Theorem)⁠를 연구하다가 소인수분해⁠(prime factorization)⁠가 하나뿐이라는 성질이 새로운 수의 세계에서 무너진다는 것을 보고 '이상적인 수'라는 유령 같은 대상을 도입해 둔 참이었습니다. 데데킨트는 이 두 문제에 똑같은 방식으로 답했습니다. 수를 수들의 모임, 곧 집합으로 정의한 것입니다.

굵은 막대가 이 사람의 생애이고, 흰검은 점은 페이지 끝 연표에 적은 일들입니다. 가는 막대는 같은 시대를 산 이 위키의 인물들입니다. 나이를 끌어 보세요.

나이 세 ·

김나지움 시절 그는 화학과 물리학에 먼저 끌렸지만, 물리학의 논리가 흐릿하다고 느껴 수학으로 돌아섰다고 전합니다. 카롤리눔을 거쳐 1850년 괴팅겐 대학에 들어갔고, 1852년 오일러 적분⁠(integral)⁠에 관한 논문으로 가우스의 마지막 박사 제자가 되었습니다. 당시 괴팅겐의 수학 교육이 베를린에 한참 뒤처져 있다는 것을 안 그는 두 해 동안 혼자 새 수학을 따라잡았고, 1854년 친구 리만과 같은 해에 교수 자격을 얻었습니다. 강사 시절 1856–58년에 그는 갈루아의 방정식 이론을 대학에서 가르친 최초의 사람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군).

1855년 가우스가 죽고 베를린의 디리클레가 뒤를 잇자, 데데킨트는 이미 강사였지만 그의 강의실에 앉았습니다. 그는 디리클레가 자신을 새 사람으로 만들었다고 편지에 적었다고 전합니다. 리만과 디리클레와 나눈 몇 해의 대화가 그의 평생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1858년 그는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의 교수가 되었다가, 1862년 고향으로 돌아와 브라운슈바이크 공과대학에서 평생 가르쳤습니다. 더 큰 대학으로 옮기지 않았고, 결혼하지 않은 채 작가인 누나 율리와 함께 살았습니다.

취리히에서 미분학을 처음 강의하게 된 그는, 위로 계속 커지지만 어떤 값을 넘지 않는 수열이 반드시 어떤 수에 다가간다는 정리를 가르치면서 결국 수직선 그림에 기댈 수밖에 없다는 데 불만을 느꼈습니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1858년 11월 24일 그 답을 찾았습니다. 유리수는 어디에나 빽빽하게 있지만 구멍투성이입니다. 유리수 전체를 두 모둠 A와 B로 가르되 A의 모든 수가 B의 모든 수보다 작게 한 것을 '절단'이라 합시다. 제곱이 2보다 작은 수와 음수를 A에, 나머지를 B에 넣으면 A에는 가장 큰 수가 없고 B에는 가장 작은 수가 없습니다. 칼로 자른 자리에 유리수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데데킨트는 그 빈자리에 무언가를 '상상'하는 대신, 이 절단 자체를 새로운 수 √2로 정의했습니다. 모든 절단의 모임이 실수이고, 실수를 다시 절단하면 이제는 언제나 그 자리에 실수가 하나 있다는 것, 곧 실수에는 빈틈이 없다는 것이 증명됩니다(수 체계⁠(number system)⁠, 극한⁠(limit)⁠).

이 생각을 담은 얇은 책 『연속성⁠(continuity)⁠과 무리수』는 14년 뒤인 1872년에 나왔습니다. 그는 이 정의로 √2 × √3 = √6 같은 사실도 처음으로 제대로 증명할 수 있다고 적었습니다. 누구나 당연하게 쓰던 식이지만, 무리수가 무엇인지 모르는 한 증명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같은 해 칸토어는 서로 한없이 가까워지는 유리수의 수열로 실수를 따로 구성했고, 하이네와 프랑스의 메레도 비슷한 무렵 비슷한 방법에 이르렀습니다. 바이어슈트라스가 베를린에서 강의하던 엄밀한 해석학이 이렇게 실수의 정의라는 바닥에 닿았습니다. 실수 하나가 무한히 많은 유리수의 모임이라는 그의 발상은 완성된 무한을 대상으로 다루는 일이었고, 무한을 다루는 법의 한 전환점입니다.

1872년 여름 스위스 게르자우에서 그는 열네 살 아래의 칸토어를 처음 만났고, 두 사람은 오랫동안 편지로 생각을 주고받았습니다. 1873년 12월 칸토어는 실수를 자연수와 짝지을 수 없다는 증명을 그에게 먼저 편지로 보냈고, 1877년에는 선분과 정사각형의 점을 일대일로 짝지을 수 있다는 결과를 보내며 "보지만, 믿지는 못하겠다"고 적었습니다(가산 집합⁠(countable set)⁠, 기수⁠(cardinal number)⁠). 데데킨트가 남긴 메모에 따르면, 대수적 수⁠(algebraic number)⁠ 전체를 셀 수 있다는 칸토어의 1874년 논문 속 증명은 자신이 편지로 알려 준 방법이었는데 논문에는 그 사실이 적히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두 사람의 우정은 이어졌고, 1899년 칸토어가 집합론⁠(set theory)⁠의 역설을 처음 털어놓은 상대도 데데킨트였습니다.

정수론에서 그는 디리클레의 강의를 엮어 1863년 『정수론 강의』를 펴내고, 1871년 둘째 판부터 부록에 자기 이론을 실었습니다. 문제는 이렇습니다. 정수⁠(integer)⁠에서는 6 = 2 × 3처럼 소인수분해가 한 가지뿐입니다(소인수분해). 그런데 a + b√−5 꼴의 수들 안에서는 6 = 2 × 3 = (1 + √−5)(1 − √−5)로 두 가지로 쪼개지고, 네 인수 모두 더 쪼갤 수 없습니다(복소수⁠, complex number⁠). 쿰머는 이런 곳에 '이상적인 수'가 숨어 있다고 상상했습니다. 데데킨트는 그 유령을 구체적인 대상으로 바꾸었습니다. 수 하나 대신, 서로 더해도 그 안에 있고 그 수 세계(여기서는 a + b√−5 꼴의 수들)의 아무 수를 곱해도 그 안에 있는 수들의 모임을 봅니다. 정수에서 2의 배수⁠(multiple)⁠ 전체가 그런 모임이고, 이것을 아이디얼이라 부릅니다. 그러면 수의 분해는 무너져도 아이디얼의 분해는 언제나 소 아이디얼⁠(prime ideal)⁠들의 곱으로 단 한 가지가 됩니다. 사칙연산에 닫힌 수의 모임을 '체'라고 부르자고 제안한 것도 이 부록이었습니다(정수론).

1888년의 『수란 무엇이며 무엇이어야 하는가』에서 그는 자연수 자체를 집합과 사상(함수⁠, function⁠)만으로 세웠습니다. 머리말에서 그는 수가 인간 정신의 자유로운 창조물이라고 썼습니다. 그는 먼저 무한을 정의했습니다. 자기 자신의 일부와 일대일 대응⁠(one-to-one correspondence)⁠이 되는 집합이 무한 집합입니다. 자연수는 n을 2n에 보내는 짝짓기로 짝수 전체와 남김없이 짝지어지니 무한입니다. 그리고 1에서 시작해 '다음 수'로 가는 규칙을 되풀이해 닿는 것만 모은 가장 작은 모임, 그가 '사슬'이라 부른 것으로 자연수를 정의했습니다. 이 정의에서 수학적 귀납법⁠(mathematical induction)⁠은 믿음이 아니라 정리가 되고, n!이나 aⁿ처럼 앞의 값으로 다음 값을 정하는 정의가 늘 하나의 함수를 정한다는 것도 증명됩니다(재귀⁠, recursion⁠). 이듬해 이탈리아의 페아노가 이 조건들을 기호로 된 공리⁠(axiom)⁠로 적었고, 오늘날 흔히 다섯 문장으로 정리하는 이것을 페아노 공리라 부릅니다(공리). 비슷한 때 예나의 프레게도 산술을 논리에서 이끌어 내고 있었고, 두 사람의 작업은 수학 기초론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한 가지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한 수학자 달력이 그의 사망일을 1899년 9월 4일로 잘못 적자, 데데킨트는 편집자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은 그날을 아주 건강하게, 점심 손님이자 벗인 칸토어와 즐거운 대화를 나누며 보냈다고 알렸습니다. 그는 그 뒤로도 16년 넘게 더 살아 1916년 브라운슈바이크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영향은 그가 죽은 뒤에 더 커졌습니다. 1882년 베버와 함께 쓴 논문은 리만 곡면⁠(Riemann surface)⁠ 위의 함수를 순수하게 대수적으로 다루어 대수기하학의 한 뿌리가 되었고, 그가 만년에 연구한 격자 이론도 다시 발견되었습니다. 힐베르트의 1897년 정수론 보고서가 그의 아이디얼 위에 섰고, 괴팅겐의 에미 뇌터는 그의 방법을 수가 아닌 대상 일반으로 넓혀 추상 대수를 세웠습니다. 뇌터는 학생들에게 "모든 것이 이미 데데킨트에게 있다"고 자주 말했다고 전하고, 1930–32년 그의 전집을 함께 엮었습니다. 수를 수들의 모임으로, 분해를 모임의 분해로 바꿔 본 그의 방식은 표현 바꾸기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어지는 곳. 절단은 무리수, 수 체계, 극한으로, 무한의 정의는 일대일 대응, 가산 집합, 무한을 다루는 법으로, 자연수의 구성은 수학적 귀납법, 재귀, 공리로 이어집니다. 아이디얼은 소인수분해와 정수론에 있습니다. 스승 가우스와 디리클레, 친구 리만과 칸토어, 그의 뒤를 이은 에미 뇌터를 함께 읽으면 좋습니다.

관계.

가운데가 이 사람, 둘레가 이어진 인물들입니다. 선의 색은 관계의 종류(초록 스승·제자, 파랑 함께 연구, 보라 편지, 빨강 논쟁, 주황 영향)이고, 다른 인물의 페이지에 적힌 관계도 함께 모았습니다.

  • 스승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 — 1852년 가우스의 지도로 박사 학위를 받아 그의 마지막 박사 제자가 되었고, 가우스의 최소제곱⁠(least squares)⁠ 강의를 들었습니다.
  • 스승 페터 구스타프 르죈 디리클레 — 1855년 괴팅겐에 온 디리클레의 강의를 이미 강사이던 몸으로 들었고, 그 정수론 강의를 엮어 1863년 펴내며 부록에 자기 이론을 실었습니다.
  • 함께 연구 베른하르트 리만 — 괴팅겐 시절 가장 가까운 친구였고, 리만이 죽은 뒤 교수 자격 강연과 논문을 출판하고 하인리히 베버와 전집을 엮으며 전기를 썼습니다.
  • 편지 게오르크 칸토어 — 1872년 스위스에서 처음 만나 오래 편지를 나누었고, 1873년 실수가 셀 수 없다는 증명과 1877년 선분과 정사각형의 결과를 가장 먼저 받아 본 사람이었습니다.
  • 영향을 줌 다비트 힐베르트 — 힐베르트가 1897년 독일수학회에 낸 대수적 정수론⁠(algebraic number theory)⁠ 보고서는 그의 아이디얼 이론을 토대로 삼았습니다.
  • 영향을 줌 에미 뇌터 — 뇌터는 그의 아이디얼 이론을 추상 대수로 넓히며 '모든 것이 이미 데데킨트에게 있다'고 자주 말했다고 전하고, 1930–32년 그의 전집을 함께 엮었습니다.
  • 영향을 줌 주세페 페아노 — 1888년 책에서 자연수를 특징짓는 조건을 적었고, 이듬해 페아노가 이와 거의 같은 공리를 발표하며 그의 책을 참고했다고 밝혔습니다.

연표.

  • 1848년 브라운슈바이크의 카롤리눔 학교에 들어가다
  • 1850년 괴팅겐 대학에 들어가다
  • 1852년 가우스의 지도로 박사 학위를 받다
  • 1854년 리만과 같은 해에 교수 자격을 얻다
  • 1855년 괴팅겐에 온 디리클레의 강의를 듣고 가까워지다
  • 1858년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 교수가 되어, 강의를 준비하다 실수의 연속성을 정의할 방법을 떠올리다
  • 1862년 고향 브라운슈바이크의 공과대학으로 돌아오다
  • 1863년 디리클레의 『정수론 강의』를 엮어 펴내다
  • 1871년 그 둘째 판의 부록에서 아이디얼과 체를 도입하다
  • 1872년 『연속성과 무리수』를 펴내고 칸토어를 처음 만나다
  • 1876년 하인리히 베버와 리만 전집을 펴내다
  • 1882년 베버와 함께 대수 함수론 논문을 발표하다
  • 1888년 『수란 무엇이며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펴내다
  • 1894년 공과대학에서 정년퇴임하다
관련된 시대와 장소괴팅겐
이 개념이 나오는 큰 생각자기 참조와 대각선

이 인물이 나오는 긴 글

집합론 무한에도 크기가 있다 자연수와 짝수는 어느 쪽이 많을까? 칸토어는 무한을 세는 법을 찾았고, 무한이 하나가 아님을 보였다. 비유클리드 기하 평행선의 반란 유클리드의 다섯 번째 공준은 2,000년 동안 증명되지 않았다. 증명을 포기한 사람들이 찾은 것은 새로운 우주였다. 조합론 세지 않고 세기 시의 운율을 세던 인도의 운율학자부터 오일러의 생성함수까지. 하나하나 늘어놓지 않고 경우의 수를 세는 법은 어떻게 자라났을까? 수학의 오류 틀린 증명이 만든 수학 틀린 증명은 흔하다. 드물게, "정확히 어디가 틀렸는가"라는 물음이 새 분야를 낳는다. 코시의 합 정리와 균등 수렴, 라메의 증명과 아이디얼, 켐프의 사슬, 푸앵카레의 회수된 논문과 혼돈, 프레게의 법칙과 러셀의 편지, 보예보츠키와 증명 보조기까지. 오류는 대개 서로 다른 두 가지를 하나로 여긴 자리에 있었다. 반환과 동적 계획법 같은 계산, 다른 덧셈 가장 짧은 길, 길의 가짓수, 가장 그럴듯한 해석, 갈 수 있는지 없는지. 따로 태어난 알고리즘들이 사실은 한 계산이고, 달라지는 것은 더하기와 곱하기 자리에 무엇을 넣느냐뿐이다. 그렇게 바꿔 넣어도 되는 까닭은 분배법칙 하나다. 범주론 화살표만으로 본 수학 최대공약수와 교집합과 '그리고'는 같은 것이고, 화살표를 뒤집으면 최소공배수와 합집합과 '또는'이 된다.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묻지 않고 어떻게 이어지는지만 보는 언어로, '자연스럽다'는 말의 뜻, 관계만으로 대상을 알아보는 요네다의 생각, 함자로 본 연쇄법칙, 어디에나 있는 수반까지 사이트의 여러 분야를 가로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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