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랭크 램지(Frank Ramsey)
스물여섯 해의 짧은 삶 동안 논리학, 확률(probability)의 철학, 경제학에 저마다 오래 남는 논문을 쓰고, 램지 이론(Ramsey theory)에 이름을 남긴 케임브리지의 수학자이자 철학자.
프랭크 플럼프턴 램지는 1903년 케임브리지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모들린 칼리지의 학장을 지낸 수학 교사였고, 동생 마이클은 뒤에 캔터베리 대주교가 됩니다. 윈체스터 학교를 거쳐 1920년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수학을 공부했고, 1923년 최우등으로 졸업했습니다. 그 시절 케임브리지에는 러셀,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 철학자 G. E. 무어가 있었고, 러셀의 역설(Russell's paradox) 이후 수학과 논리의 토대를 다시 세우는 일이 철학의 가장 뜨거운 문제였습니다. 램지는 스무 살 남짓한 나이에 이 모든 사람과 대등하게 논쟁했습니다.
나이
두 대전 사이의 케임브리지는 작은 칼리지와 모임들이 촘촘히 얽힌 세계였고, 램지는 그 한가운데로 빠르게 들어갔습니다. 1921년 그는 비밀 토론 모임 '사도들'에 뽑혔고, 이 모임의 선배인 케인스는 곧 이 학부생의 재능을 알아보았습니다. 1922년 램지는 케인스가 막 펴낸 『확률론』을 학생 잡지에 서평하며, 명제들 사이에 사람의 판단과 상관없는 '논리적 확률(logical probability) 관계'가 있다는 그 책의 핵심 전제를 정면으로 의심했습니다. 케인스는 불쾌해하기는커녕 그를 후원했고, 1924년 스물한 살의 그가 킹스 칼리지의 펠로가 되도록 힘썼습니다. 그는 곧 칼리지의 수학 지도를 맡았고, 경제학자 아서 피구가 던진 질문에 답하다 과세 논문을 쓰게 되었습니다. 이탈리아에서 망명해 온 경제학자 피에로 스라파와도 가까웠는데, 스라파는 수십 년 뒤 대표작의 서문에서 램지의 수학적 도움에 감사했습니다.
학부생 시절 그는 독일어를 빠르게 익혀 오스트리아의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 영어 번역 초고의 대부분을 만들었고, 1923년 오스트리아의 산골 마을로 초등학교 교사가 되어 있던 비트겐슈타인을 찾아가 2주 동안 책을 한 문장씩 함께 읽었습니다. 1925년 논문 「수학의 기초(basics)」에서는 역설을 두 종류로 갈랐습니다. 러셀의 역설처럼 집합(set)과 원소(element)의 논리에서 생기는 것과, '스무 글자 안으로 정의할 수 없는 가장 작은 수' 같은 베리 역설(Berry paradox)처럼 말의 뜻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앞의 것만 막으면 수학에는 충분하다는 것을 보여, 러셀과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의 복잡한 타입(type) 체계를 단순한 층의 구조로 줄였습니다. 뒤의 것은 수학이 아니라 언어의 문제라는 그의 진단은 뒷날 콜모고로프 복잡도(Kolmogorov complexity)에서 같은 모양으로 되살아납니다. 문자열을 출력하는 가장 짧은 프로그램의 길이를 계산하는 프로그램이 있다고 해 봅시다. 그러면 '복잡도가 n보다 큰 첫 문자열'을 찾아 출력하는 프로그램을 쓸 수 있는데, 그 길이는 n을 적는 데 드는 약 log₂ n 자리에 고정된 부분을 더한 것뿐입니다. n이 충분히 크면 이 프로그램은 n보다 짧으니 모순이 생기고, 따라서 그런 프로그램은 있을 수 없습니다. 베리 역설을 계산의 말로 옮긴 논증입니다.
1924년 그는 반년 동안 빈에 머물렀습니다. 프로이트의 제자 테오도어 라이크에게 정신분석을 받으려는 것이 이유였는데, 그 무렵 빈은 정신분석과, 관찰로 확인할 수 있는 문장만 뜻이 있다고 보는 새로운 논리 실증주의 철학이 한꺼번에 피어나던 도시였고, 몇 해 뒤 괴델이 드나들게 될 빈 학파도 막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이 기간에 다시 산골의 비트겐슈타인을 찾아가 철학으로, 그리고 케임브리지로 돌아오라고 설득했습니다. 케인스와 함께 한 이 노력은 1929년 비트겐슈타인이 케임브리지로 돌아오면서 결실을 맺었고, 램지는 열네 살 위의 이 철학자가 『논리철학 논고』를 박사 논문으로 제출할 때 형식상의 지도 교수를 맡았습니다. 두 사람은 거의 날마다 만나 논리와 수학의 기초를 두고 격렬하게 토론했습니다.
1926년 강연 「진리와 확률」에서 그는 케인스의 확률론을 비판하며 확률을 한 사람이 어떤 일에 거는 믿음의 정도로 보자고 제안했습니다. 믿음은 내기로 잴 수 있습니다. 비가 오면 1을 받는 내기에 기꺼이 0.6을 낸다면 그 사람의 비에 대한 믿음은 0.6입니다. 그런데 같은 사람이 비가 오지 않는 쪽에도 0.6을 낸다면, 누군가 두 내기를 모두 팔아 그에게 1.2를 받고 어떤 날씨에도 1만 돌려주면 됩니다. 믿음이 확률의 규칙(여기서는 두 확률의 합이 1)을 어기는 사람은 반드시 잃게 만들 수 있다는 이 논증이 주관적 확률(subjective probability)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그는 사람의 선택으로부터 믿음의 정도와 효용(어떤 결과가 그 사람에게 주는 만족의 크기)을 함께 재는 방법도 내놓았는데, 이것은 폰 노이만과 경제학자 오스카어 모르겐슈테른의 기대 효용(expected utility) 이론보다 20년 가까이 앞선 것입니다(기댓값(expected value)). 새 증거를 보고 믿음을 고치는 규칙은 베이즈 정리(Bayes' theorem)입니다.
경제학에도 오래 남는 논문 두 편을 썼습니다. 1927년의 「과세 이론에 대한 기여」는 필요한 세금을 거두면서 사회의 손실을 가장 작게 하려면 소금처럼 값이 올라도 사람들이 별로 덜 사지 않는, 곧 수요가 가격에 덜 민감한 물건에 더 높은 세율을 매겨야 한다는 규칙을 이끌어 냈고(물건들의 수요가 서로 영향을 주지 않는 가장 단순한 경우의 결론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규제받는 독점 기업의 요금을 정하는 '램지 가격 결정(Ramsey pricing)'으로 쓰입니다. 1928년의 「저축의 수학적 이론」은 한 나라가 오늘 얼마를 쓰고 얼마를 미래를 위해 남겨야 하는지를 시간에 걸친 최적화(optimization) 문제로 풀었고, 수십 년 뒤 경제 성장 이론의 기본 틀이 되었습니다. 그는 여기서 시간에 걸친 소비의 경로 전체를 바꿔 가며 가장 좋은 것을 찾는 변분법(calculus of variations)을 써서, 어느 순간이든 소비를 조금 줄여 저축할 때 잃는 만족과 그 저축이 미래에 가져올 만족이 같아지는 곳이 최적이라는 조건을 이끌어 냈습니다. 또 미래 세대의 만족을 단지 늦게 온다는 이유로 깎아 계산하는 것은 윤리적으로 변호할 수 없다고 썼는데, 이 물음은 오늘날 기후 변화 정책에서 미래의 피해를 얼마로 할인할지를 둘러싼 논쟁에서 다시 불려 나옵니다. 케인스는 그가 죽은 뒤 쓴 추도문에서 이 논문을 수리 경제학에 대한 가장 뛰어난 기여 가운데 하나로 꼽았습니다(가장 좋은 것 고르기).
같은 1928년 12월 그는 런던 수학회에서 「형식 논리의 한 문제에 대하여」를 읽었습니다. 그해 힐베르트가 수리 논리학(mathematical logic)의 중심 문제로 꼽은 결정 문제(decision problem)의 한 특수한 경우, 곧 '어떤 것이 있어서' 다음에 '모든 것에 대해'가 오는 모양의 식들은 기계적으로 판정할 수 있음을 보인 논문입니다. 그 증명에 필요해서 증명한 보조정리(lemma)가 오늘날의 램지 정리입니다. 가장 작은 예가 위의 식입니다. 여섯 명 가운데 한 사람을 고르면 나머지 다섯과의 관계 가운데 적어도 셋은 같은 종류(서로 앎 또는 모름)입니다(비둘기집 원리(pigeonhole principle)). 그 셋 가운데 두 사람이 같은 관계로 이어져 있으면 처음 사람과 함께 같은 색 삼각형이 되고, 아니라면 그 셋이 반대 색 삼각형을 이룹니다. 다섯 명이면 오각형과 별 모양으로 칠해 피할 수 있으니 6이 경계입니다. 그는 이것을 무한 집합과 여러 색으로 일반화했고, 논문 안에서 이 조합의 정리들이 그 자체로 흥미롭다고 적어 두었습니다. 그 말대로 본 정리보다 보조정리가 오래 살아남아, 에르되시와 헝가리의 수학자 세케레시 죄르지의 1935년 논문을 거쳐 램지 이론이라는 조합론(combinatorics)의 한 분야가 되었습니다.
1930년 1월 그는 심한 황달로 런던의 병원에서 복부 수술을 받은 뒤 스물여섯 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수영을 좋아해 캠강에서 자주 헤엄쳤는데, 그때 걸린 세균 감염병인 렙토스피라증이 제대로 진단되지 않았을 수 있다는 추정이 2020년 철학자 셰릴 미삭이 쓴 전기에 실렸습니다. 결정 문제를 다룬 그의 논문은 그가 죽은 해에 실렸고, 그해 가을 괴델이 불완전성 정리(incompleteness theorem)를 발표했습니다. 확률의 철학, 경제학, 조합론에 그의 이름이 붙은 개념이 따로따로 남아 있습니다.
그의 생각들은 대부분 그가 죽은 뒤에야 제 몫의 평가를 받았습니다. 「진리와 확률」은 1931년 유고집으로 나왔는데, 같은 해 이탈리아의 브루노 데 피네티가 독립적으로 거의 같은 주관적 확률론을 발표했고, 1954년 미국의 레너드 새비지가 두 사람의 생각을 묶어 베이즈 통계학(statistics)의 토대로 삼았습니다. 성장 이론은 1960년대 경제학자 데이비드 캐스와 티알링 쿠프먼스가 그의 모형을 되살리면서 경제학 교과서의 중심에 들어왔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뒤의 대표작 『철학적 탐구』 서문에서, 자신의 첫 책의 잘못을 깨닫는 데 램지의 비판이 스스로도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큰 도움이 되었다고 적었습니다. 조합론에서는 램지 수(Ramsey number)를 구하는 일이 극도로 어렵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넷씩 모이는 경우의 값 18은 1955년에야 확정되었고, 다섯씩 모이는 경우의 값은 컴퓨터로도 아직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이어지는 곳. 여섯 명의 파티에서 시작하는 이야기는 램지 이론과, 사람을 점으로 관계를 색칠한 선으로 보는 그래프에서 이어집니다. 램지 수의 하한(lower bound)을 에르되시가 동전 던지기로 증명한 방법은 확률적 방법(probabilistic method)에서, 선 대신 수를 칠해도 같은 색 등차수열(arithmetic progression)이 반드시 생긴다는 짝 정리는 반 데르 바르던 정리(van der Waerden's theorem)에서 이어집니다. 무한 램지 정리(infinite Ramsey theorem)는 자연수(natural number)처럼 번호를 붙일 수 있는 무한집합, 곧 가산 집합(countable set)에 대한 정리이고, 1977년 수학자 제프 파리스와 레오 해링턴은 그 유한한 변형 하나가 참이지만 자연수의 공리(axiom)들(페아노 산술, Peano arithmetic)로는 증명할 수 없음을 보였습니다.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가 말한 '참이지만 증명할 수 없는 문장'의 자연스러운 수학적 예로 흔히 첫손에 꼽힙니다.
관계.
- 영향을 받음 버트런드 러셀 — 러셀과 화이트헤드의 『수학 원리』를 이어받아, 1925년 그 복잡한 타입 체계를 단순한 층의 구조로 줄였습니다.
- 영향을 받음 다비트 힐베르트 — 힐베르트가 1928년 중심 문제로 꼽은 결정 문제의 한 경우를 풀다가, 그 보조정리로 램지 정리를 증명했습니다.
- 영향을 줌 에르되시 팔 — 그의 죽음 뒤 에르되시와 세케레시가 1935년 램지 정리를 따로 다시 발견해 조합론의 한 분야로 키웠습니다.
연표.
- 1920년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에 들어가다
- 1921년 토론 모임 '사도들'의 회원이 되다
- 1922년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 영어판이 그의 번역 초고로 나오고, 케인스의 확률론을 비판하는 서평을 쓰다
- 1923년 수학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오스트리아로 비트겐슈타인을 찾아가다
- 1924년 빈에서 반년을 지낸 뒤 킹스 칼리지의 펠로가 되다
- 1925년 「수학의 기초」에서 러셀의 타입 이론(type theory)을 단순하게 고치고 레티스 베이커와 결혼하다
- 1926년 강연 「진리와 확률」에서 확률을 믿음의 정도로 보다
- 1927년 「과세 이론에 대한 기여」를 발표하다
- 1928년 「저축의 수학적 이론」을 발표하고 런던 수학회에서 램지 정리가 담긴 논문을 읽다
- 1929년 케임브리지로 돌아온 비트겐슈타인의 박사 논문 지도 교수를 맡다
- 1930년 스물여섯 살로 세상을 떠나다
이 인물이 나오는 긴 글
이 인물을 언급하는 페이지
- 램지 이론
… R(s, t) 라고 합니다. 방금 본 것이 R(3,3) = 6 입니다. 1930년 영국의 수학자이자 철학자프랭크 램지는 논리학 논문 속에서 이런 수가 언제나 유한하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같은 논법을 되풀이하면 위의 부등식 …
- 수학 기초론 논쟁
… 『논리철학 논고』(1921)에서 논리의 명제는 세계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항진명제라고 주장했고,램지는 이 생각을 받아들여 1926년 러셀의 체계를 단순하게 다듬었습니다. 형식주의: 수학은 규칙이 분명한 …
- 타입 이론
… 화이트헤드의 『수학 원리』(1910–1913)는 층을 더 잘게 나눈 분지 유형 이론을 썼고, 1920년대에램지등이 이것을 단순 유형 이론으로 다듬었습니다. 1940년 처치는 단순 유형 이론을 자신의 람다 계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