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 개념 지도
인물

로널드 피셔(Ronald Fisher)

무작위 배정⁠(random assignment)⁠, 분산분석⁠(analysis of variance)⁠, 최대가능도법⁠(maximum likelihood)⁠으로 현대 통계학⁠(statistics)⁠과 실험 설계를 세우고 집단유전학⁠(population genetics)⁠의 기초⁠(basics)⁠를 놓은 영국의 통계학자. 평생 우생학⁠(eugenics)⁠을 옹호했다.

θ^=arg⁡max⁡θ∏i=1nf(xi; θ)\hat\theta = \arg\max_{\theta} \prod_{i=1}^{n} f(x_i;\, \theta)

로널드 에일머 피셔는 1890년 런던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부터 눈이 몹시 나빠 밤에 책을 읽지 못하게 되자 선생님들이 종이와 연필 없이 말로 수학을 가르쳤고, 그 덕에 문제를 머릿속의 기하학적 그림으로 푸는 힘이 자랐다고 합니다. 1909년 케임브리지 곤빌 앤드 키즈 칼리지에서 수학을 공부했습니다. 그 시절 생물학은 둘로 갈라져 있었습니다. 되살아난 그레고어 멘델의 유전 법칙을 따르는 쪽은 형질이 띄엄띄엄한 단위로 전해진다고 보았고, 피어슨이 이끄는 생물측정학파는 키처럼 연속적으로 변하는 형질의 상관을 쟀습니다. 두 진영은 서로를 부정하고 있었습니다.

굵은 막대가 이 사람의 생애이고, 흰검은 점은 페이지 끝 연표에 적은 일들입니다. 가는 막대는 같은 시대를 산 이 위키의 인물들입니다. 나이를 끌어 보세요.

나이 세 ·

1912년 졸업한 뒤 그의 길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런던 금융가의 투자 회사에서 통계 담당으로 일했고, 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자원입대하려 했지만 시력 때문에 번번이 거절당해 1915년부터 네 해 동안 사립학교에서 수학과 물리를 가르쳤습니다. 그 사이 1915년 그는 표본⁠(sample)⁠에서 계산한 상관계수⁠(correlation coefficient)⁠가 얼마나 흩어지는지를 정확히 구한 논문을 피어슨의 『바이오메트리카』에 실었습니다. 그런데 1917년 피어슨의 연구실이 그의 방법을 비판하는 긴 논문을 그에게 미리 알리지도 않고 실었고, 이듬해 멘델 유전과 연속 형질을 잇는 그의 논문은 왕립학회에서 반려되었습니다. 이 논문을 살린 사람은 다윈의 아들이자 우생학회 회장이던 레너드 다윈이었습니다. 그는 젊은 피셔를 후원하며 논문이 에든버러 왕립학회에서 출판되도록 도왔고, 피셔는 평생 그를 스승처럼 따랐습니다. 두 통계학자의 반목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1918년 피셔는 이 대립을 수학으로 풀었습니다. 효과가 작은 유전자가 아주 많이 모여 한 형질을 정한다면, 멘델식의 띄엄띄엄한 유전이 모여 연속적인 종 모양 분포를 이룹니다(중심극한정리⁠(central limit theorem)⁠, 정규분포⁠(normal distribution)⁠). 그는 친척 사이의 상관을 설명하려고 형질의 흩어짐을 유전과 환경 같은 원인별 몫으로 나누었고, 이때 표준편차⁠(standard deviation)⁠의 제곱에 분산⁠(variance)⁠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분산은 독립⁠(independence)⁠인 원인들의 몫을 그냥 더하면 되기 때문에, 전체 흩어짐을 조각으로 나누는 분산분석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1930년의 『자연선택의 유전 이론』은 영국의 유전학자 J. B. S. 홀데인, 미국의 유전학자 수얼 라이트의 연구와 함께, 다윈의 자연선택과 멘델 유전학을 잇는 집단유전학(집단 안에서 유전자의 비율이 세대에 따라 어떻게 변하는지 다루는 분야)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1919년 그는 피어슨이 제안한 자리를 마다하고 하펜던의 로담스테드 농업 시험장으로 갔습니다. 70년 넘게 쌓인 밀밭 자료를 분석하던 그는 근본적인 어려움에 부딪혔습니다. 흙의 비옥도와 물 빠짐이 구획마다 달라서 비료의 효과와 뒤섞이는 것입니다(교란). 그의 답은 어느 구획에 어떤 처리를 할지를 제비뽑기로 정하는 것이었습니다. 무작위로 배정하면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요인까지 평균적으로 고르게 나뉘고, 결과가 우연인지 따지는 확률⁠(probability)⁠의 근거도 실험자가 섞은 순서 자체에서 나옵니다(무작위 대조 시험⁠, randomized controlled trial⁠). 그는 밭을 블록으로 나누고, 가로줄과 세로줄마다 처리가 한 번씩만 오게 하는 라틴 방진(최석정과 오일러가 먼저 연구한 배열)을 실험 설계에 들였습니다. 이렇게 하면 밭의 한쪽 끝이 더 기름지더라도 그 영향이 모든 처리에 고르게 나뉩니다. 1925년의 『연구자를 위한 통계적 방법』에서는 효과가 없다고 가정할 때 우연히 그만한 결과가 나올 확률이 스무 번에 한 번보다 작으면 의미 있다고 보는 것이 편리하다고 썼고, 이것이 오늘날 널리 쓰이는 0.05 기준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1935년 『실험 설계』의 둘째 장은 우유를 먼저 부었는지 맞힌다는 부인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여덟 잔 가운데 네 잔을 고르는 방법은 이항계수⁠(binomial coefficient)⁠ (84)=70\binom{8}{4} = 70가지이니, 아무 능력 없이 다 맞힐 확률은 1/70입니다(파스칼의 삼각형⁠, Pascal's triangle⁠).

그가 있던 14년 동안 로담스테드는 통계학의 새 중심이 되었습니다(골턴 연구소와 로담스테드). 1843년부터 같은 밭에 같은 비료를 주어 온 긴 실험의 기록이 그의 재료였고, 그는 손으로 돌리는 계산기 앞에서 분산분석의 표를 만들어 냈습니다. 기네스 양조장의 고셋은 오랜 편지 친구로서 작은 표본의 문제를 함께 고민했고, 인도의 마할라노비스, 미국의 통계학자 해럴드 호텔링 같은 방문자들이 이곳에서 그의 방법을 배워 갔습니다. 미국 아이오와 주립 대학의 조지 스네데커는 1931년과 1936년 그를 초빙했고, 그의 방법을 풀어 쓴 교과서로 미국 농과 대학들에 퍼뜨렸습니다. 농업 시험장에서 시작된 이 방법은 곧 심리학 실험과 공장의 품질 관리, 의학으로 번졌습니다. 그 과정에서 1930년대 런던의 폴란드 출신 통계학자 예지 네이만과는 라틴 방진⁠(Latin square)⁠ 실험의 오차를 두고 왕립 통계학회 회의장에서 공개적으로 충돌했고, 가설 검정을 '결정의 규칙'으로 본 네이만과 '증거의 척도'로 본 그의 대립은 오늘날 교과서의 뒤섞인 검정 방식에 그대로 흔적을 남겼습니다.

그는 추정의 이론도 새로 세웠습니다. 위의 식처럼, 관찰한 자료가 나올 확률을 모수(분포를 정하는 모르는 값, 이를테면 동전의 앞면 확률 p)의 함수⁠(function)⁠로 보고(가능도⁠, likelihood⁠) 그것을 가장 크게 하는 값을 추정값으로 삼는 최대가능도법입니다. 동전을 10번 던져 앞면이 7번 나왔다면 그 결과의 확률은 p7(1−p)3p^7(1-p)^3에 비례하고, 이것을 가장 크게 하는 p는 0.7입니다. 곱을 다루기 어려우면 로그를 취해 합으로 바꾸고 미분⁠(differentiation)⁠해서 0이 되는 곳을 찾습니다(최적화⁠, optimization⁠). 1922년 논문에서는 좋은 추정이 갖춰야 할 성질들을 정리했고, 분포가 적당히 매끄럽다는 조건 아래 표본이 커질 때 최대가능도 추정이 참값 둘레로 가장 좁게 모인다고 논증했습니다. 이 논증의 빈틈은 뒤에 여러 사람이 엄밀하게 메웠습니다. 1936년에는 붓꽃 세 종의 꽃잎과 꽃받침을 잰 자료로 종을 가르는 판별 분석⁠(discriminant analysis)⁠을 발표했습니다. 같은 해 마할라노비스가 발표한 일반화된 거리와 같은 공분산 행렬⁠(covariance matrix)⁠을 쓰는 방법이고, 이 붓꽃 자료는 지금도 최근접 이웃 분류⁠(k-nearest neighbors classification)⁠나 k-평균 군집⁠(k-means clustering)⁠을 처음 배울 때 쓰입니다. 그는 사전 확률⁠(prior probability)⁠에 기대는 베이즈 정리⁠(Bayes' theorem)⁠식 추론을 강하게 비판했고, 가설 검정의 틀을 두고는 예지 네이만, 이건 피어슨과 오래 다투었습니다.

유전학에서도 그의 수학은 생물학자들이 쓰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집단 안에서 유전자의 빈도가 선택과 우연에 따라 어떻게 변하는지를 두고 그는 미국의 슈얼 라이트와 수십 년 동안 논쟁했습니다. 큰 집단에서 작은 선택이 꾸준히 쌓이는 것을 중시한 피셔와, 작은 무리로 나뉜 집단에서 우연한 표류가 하는 몫을 강조한 라이트의 차이는 진화 생물학의 오랜 쟁점으로 남았습니다. 2차 세계대전 중 그의 연구실은 수혈을 위해 혈액형을 조사하는 일을 맡았고, 그는 새로 발견된 Rh 혈액형의 복잡한 유전 양상을 세 쌍의 유전자로 설명하는 표기법을 제안했습니다. 1943년에는 케임브리지의 유전학 교수가 되었고, 1956년부터 세 해 동안 모교 곤빌 앤드 키즈 칼리지의 학장을 지냈습니다.

그는 평생 우생학을 옹호했습니다. 학생 시절 케임브리지 대학 우생학회의 창립을 도왔고, 『자연선택의 유전 이론』의 뒷부분 여러 장을 사회 계층별 출생률과 문명의 쇠퇴를 논하는 데 할애하며 '우수한' 계층의 출산을 장려하는 정책을 주장했습니다. 1933년에는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의 골턴 우생학 석좌교수가 되었고, 1950년대 초에는 인종 사이에 지적 능력의 타고난 차이가 없다는 취지의 유네스코 인종 성명에 반대 의견을 냈습니다. 이런 견해는 당시 영국과 미국의 많은 과학자가 함께 가졌던 것이지만 오늘날에는 과학적 근거가 없다고 여겨집니다. 2020년 케임브리지의 곤빌 앤드 키즈 칼리지는 그를 기리던 스테인드글라스 창을 떼어 냈습니다.

말년의 가장 큰 논쟁은 흡연이었습니다. 1957년부터 그는 오스틴 브래드퍼드 힐과 리처드 돌의 연구를 공격하며, 흡연 성향과 폐암을 함께 일으키는 체질이 있을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 가능성을 제기한 논리 자체는 틀리지 않았습니다. 사람에게 흡연을 무작위로 배정할 수 없으니, 관찰 연구⁠(observational study)⁠만으로는 이런 교란을 완전히 지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1959년 코른필드와 동료들은 그 체질이 흡연자에게 적어도 아홉 배 더 흔해야 관찰된 위험의 차이를 설명할 수 있다고 계산해 이 반론의 힘을 크게 줄였습니다. 그는 파이프 담배를 즐겼고 영국 담배 제조업체 단체의 자문을 맡고 있었으며, 증거가 쌓인 뒤에도 입장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1952년 기사 작위를 받았고, 1959년 오스트레일리아의 애들레이드로 옮겨 1962년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오늘날 그의 유산은 가장 널리 쓰이는 동시에 가장 많이 비판받는 도구이기도 합니다. 그가 '편리한 기준'이라고 했던 0.05는 수십 년 동안 논문 출판의 문턱⁠(threshold)⁠처럼 쓰였고, 유의한 결과만 골라 싣는 관행이 재현되지 않는 연구를 쏟아 냈다는 반성 속에 2016년 미국 통계학회는 p값⁠(p-value)⁠, 곧 효과가 없다고 가정할 때 관찰한 것만큼 극단적인 결과가 나올 확률의 오용을 경고하는 성명을 냈습니다. 그가 거부한 베이즈 추론은 컴퓨터 시대에 크게 되살아났습니다. 그러나 무작위 배정이라는 그의 생각, 곧 실험자가 일부러 주사위를 굴려 보이지 않는 교란까지 끊는다는 발상은 의학과 사회과학, 사용자를 무작위로 두 무리로 나눠 두 가지 화면을 비교하는 인터넷 기업의 A/B 시험에 이르기까지 원인을 확인하는 가장 믿을 만한 방법으로 남아 있습니다(무작위성).

이어지는 곳. 무작위 배정이 교란을 끊는 원리는 무작위 대조 시험과 교란에서, 흩어짐을 더하는 규칙은 분산에서, 붓꽃 자료를 가르는 기하⁠(geometry)⁠는 마할라노비스 거리⁠(Mahalanobis distance)⁠에서 이어집니다. 무작위 배정 없이 인과⁠(causation)⁠를 말하는 방법은 오스틴 브래드퍼드 힐의 관점과 펄의 인과 그래프⁠(causal graph)⁠가 이어받았습니다. 그의 앞에는 상관과 회귀를 처음 생각한 골턴과, 그 생각을 수학으로 다듬고 그와 평생 다툰 피어슨이 있었습니다.

관계.

가운데가 이 사람, 둘레가 이어진 인물들입니다. 선의 색은 관계의 종류(초록 스승·제자, 파랑 함께 연구, 보라 편지, 빨강 논쟁, 주황 영향)이고, 다른 인물의 페이지에 적힌 관계도 함께 모았습니다.

  • 영향을 받음 프랜시스 골턴 — 학생 시절부터 골턴의 유전 연구와 우생학을 따랐고, 1933년 골턴의 이름이 붙은 우생학 석좌를 이어받았습니다.
  • 논쟁 오스틴 브래드퍼드 힐 — 1957년부터 돌과 힐의 흡연–폐암 연구를 공격하며, 흡연과 폐암을 함께 일으키는 체질이 있을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연표.

  • 1912년 최대가능도법의 싹이 된 첫 논문을 내다
  • 1915년 『바이오메트리카』에 표본 상관계수의 분포를 싣다
  • 1918년 멘델 유전과 연속 형질을 잇는 논문에서 '분산'이라는 말을 쓰다
  • 1919년 로담스테드 시험장의 통계학자가 되다
  • 1922년 「이론 통계학의 수학적 기초」를 발표하다
  • 1925년 『연구자를 위한 통계적 방법』을 펴내다
  • 1929년 영국 왕립학회 회원이 되다
  • 1930년 『자연선택의 유전 이론』을 펴내다
  • 1931년 미국 아이오와 주립 대학에 초빙되어 가르치다
  • 1933년 피어슨의 뒤를 이어 유니버시티 칼리지의 골턴 석좌교수가 되다
  • 1935년 『실험 설계』를 펴내다
  • 1936년 붓꽃 자료로 판별 분석을 발표하다
  • 1943년 케임브리지의 유전학 교수가 되다
  • 1952년 기사 작위를 받다
  • 1957년 흡연이 폐암의 원인이라는 결론을 공격하기 시작하다
  • 1959년 오스트레일리아 애들레이드로 옮기다
이 개념이 나오는 큰 생각무작위성

이 인물이 나오는 긴 글

확률 도박판에서 온 편지 1654년, 도중에 멈춘 내기의 판돈을 어떻게 나눌까? 두 수학자가 주고받은 편지에서 확률론이 태어났다. 통계와 인과 담배와 폐암 상관관계는 인과관계가 아니라고들 한다. 그렇다면 담배가 폐암을 일으킨다는 것은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거리와 유사도 까마귀와 택시 까마귀는 곧장 날고 택시는 블록을 돌아간다. '얼마나 먼가'에는 답이 하나가 아니고, 어떤 거리를 고르느냐가 통계와 기계 학습의 답을 바꾼다. 조합론 세지 않고 세기 시의 운율을 세던 인도의 운율학자부터 오일러의 생성함수까지. 하나하나 늘어놓지 않고 경우의 수를 세는 법은 어떻게 자라났을까? 역문제 거꾸로 푸는 문제는 왜 어려운가 원인에서 결과를 계산하기는 쉽다. 흐린 사진, CT, 블랙홀 사진은 왜 결과에서 원인을 되찾기 어려웠을까? 작은 특잇값이 잡음을 키우는 벽과, 정규화·릿지 회귀·베이즈 사전확률이 사실은 같은 처방이라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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