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스노(John Snow)
1854년 런던 콜레라를 지도와 비교로 추적해 병이 물로 옮는다는 증거를 쌓은 영국의 의사로, 역학(疫學)과 자연 실험(natural experiment)의 선구자.
존 스노는 1813년 잉글랜드 요크의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난 의사입니다. 그가 살던 19세기 중반의 런던은 인구가 빠르게 불어난 세계 최대의 도시였고, 하수와 식수가 뒤섞인 템스강을 끼고 있었습니다. 아시아에서 건너온 콜레라는 1831–32년, 1848–49년, 1853–54년에 되풀이해 유행하며 그때마다 영국에서 수만 명을 죽였지만, 병의 원인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당시 의학계의 주류는 썩은 공기, 곧 '독기(미아스마)'가 병을 퍼뜨린다고 보았습니다. 스노는 세균이 발견되기 전에, 숫자와 지도만으로 콜레라가 물로 옮는다는 증거를 쌓았습니다.
나이
독기설이 무지의 소산이기만 했던 것은 아닙니다. 악취 나는 빈민가에 병이 많다는 것은 누구나 볼 수 있는 사실이었고, 1840년대 공중위생 운동을 이끈 채드윅 같은 개혁가들은 바로 이 믿음으로 오물을 치우고 하수를 정비하자고 정부를 설득했습니다. 그런데 그 개혁이 도리어 콜레라를 키웠습니다. 집집마다 있던 오물 구덩이를 없애고 하수를 관으로 흘려보내자 하수는 곧장 템스강으로 들어갔고, 수도 회사들은 그 강물을 퍼 올려 시민들에게 팔았습니다. 1848–49년 유행으로 런던에서만 1만 4천 명 넘게 죽었습니다. 같은 무렵 통계청의 윌리엄 파는 매주 사망 통계(statistics)를 내며 콜레라 사망률이 지대가 낮은 동네일수록 높다는 것을 보였고, 이것을 강가의 나쁜 공기 탓으로 읽었습니다. 스노와 파는 같은 숫자를 서로 다르게 읽었지만, 스노의 조사는 파가 모은 주소와 통계에 크게 기댔습니다.
열네 살에 뉴캐슬의 외과 의사에게 도제로 들어간 그는 1831–32년 콜레라가 처음 영국에 닥쳤을 때 탄광 마을의 환자들을 돌보았습니다. 1836년 무렵 런던으로 와서 공부를 마쳤고, 1844년 런던 대학에서 의학 박사가 되었습니다. 술을 마시지 않고 채식을 한 것으로 알려진 그는 처음에는 마취로 이름을 얻었습니다. 에테르와 클로로포름의 양을 정밀하게 조절하는 방법을 연구했고, 1853년 빅토리아 여왕이 레오폴드 왕자를 낳을 때 클로로포름을 썼습니다.
콜레라에 대한 그의 추론은 병의 모양에서 출발했습니다. 콜레라는 폐가 아니라 장을 먼저 공격하니, 병을 옮기는 무언가는 숨이 아니라 입으로 들어올 것입니다. 1849년 그는 환자의 배설물로 더러워진 물이 병을 옮긴다고 주장하는 소책자를 냈습니다. 1854년 8월 31일 밤 런던 소호의 브로드 가 둘레에서 콜레라가 터지자, 그는 사망자 명단과 주소를 받아 집집마다 찾아가 물을 어디서 길었는지 물었고, 거리 지도 위에 사망자를 집마다 막대로 쌓아 표시했습니다. 사망자는 브로드 가의 펌프 둘레에 몰려 있었습니다. 집마다 가장 가까운 펌프를 정해 동네를 나누면 보로노이 다이어그램(Voronoi diagram)이 되는데, 스노는 직선거리가 아니라 거리를 따라 걸어가는 거리, 곧 그래프 위의 최단 경로(shortest path)로 경계를 그렸습니다.
그가 설득력을 얻은 것은 예외들을 설명해서였습니다. 펌프 가까이 있는데도 사망자가 거의 없던 구빈원에는 자체 우물이 있었고, 양조장의 일꾼들은 맥주를 마셨습니다. 반대로 멀리 햄스테드에 살던 한 부인은 브로드 가의 물맛을 좋아해 일부러 길어다 마셨고 콜레라로 죽었습니다. 9월 7일 스노는 교구 위원회를 설득했고 이튿날 펌프 손잡이가 떼어졌습니다. 흔히 이 장면이 유행을 멈춘 순간으로 이야기되지만, 사망은 그 며칠 전부터 이미 줄고 있었고 스노 자신도 그 점을 인정했습니다.
그의 결론을 가장 끈질기게 확인한 사람은 뜻밖에도 반대편에서 나왔습니다. 브로드 가가 속한 교구의 젊은 부목사 헨리 화이트헤드는 처음에는 물 전파설을 믿지 않았습니다. 교구민들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그는 집집마다 다시 찾아가 물었고, 조사할수록 스노가 옳다는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그리고 브로드 가 40번지에서 유행 직전에 콜레라 증세로 앓다 죽은 아기를 찾아냈습니다. 아기의 기저귀를 빤 물은 펌프 우물 바로 옆의 오물 구덩이로 흘러들었고, 구덩이의 벽돌은 낡아 틈이 벌어져 있었습니다. 교구의 콜레라 조사 위원회가 1855년에 낸 보고서는 스노의 지도를 싣고, 펌프의 물이 원인이라는 결론을 받아들였습니다.
그가 더 강한 증거로 본 것은 템스강 남쪽이었습니다. 남런던에는 두 수도 회사가 같은 거리 밑으로 나란히 관을 놓고 물을 댔는데, 한 회사는 하수가 흘러드는 곳의 강물을, 다른 회사는 1852년 상류로 옮긴 취수구의 물을 보냈습니다. 어느 집이 어느 회사의 물을 받는지는 오래전 계약으로 정해졌을 뿐 부자인지 가난한지와 거의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가난이나 공기처럼 물 말고 다른 교란 변수(confounding variable)가 결과를 가를 여지가 적습니다. 스노가 모은 유행 초기 7주의 수치는 집 1만 채당 콜레라 사망 315명 대 37명, 곧 하류의 물을 받은 집에서 8.5배쯤 많이 죽었습니다(위의 식). 사망자 수가 아니라 '그 회사의 물을 받는 집'만 놓고 센 비율을 견주었기에(조건부 확률(conditional probability)과 같은 생각입니다), 고객 수가 다른 두 회사를 공정하게 비교할 수 있었습니다. 역사가 우연히 차려 준 이런 비교를 오늘날 자연 실험이라 부르고, 일부러 제비를 뽑아 무리를 나누는 무작위 대조 시험(randomized controlled trial)이 같은 논리를 스스로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정부의 판단은 달랐습니다. 보건국이 꾸린 과학 조사 위원회는 1855년 보고서에서 스노의 이론을 검토한 뒤 받아들이지 않고, 대기의 상태와 독기(miasma)를 더 그럴듯한 원인으로 꼽았습니다. 그는 1850년 창립된 런던 역학회의 창립 회원이었지만, 숫자로 원인을 가리는 그의 방식이 역학의 표준이 된 것은 한참 뒤였습니다. 1858년 그가 죽었을 때 의학지 『랜싯』의 부고는 몇 줄에 그쳤고 콜레라 연구는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전환점은 1866년 런던 동부의 유행이었습니다. 이번에는 파가 한 수도 회사의 물을 받은 지역에 사망이 몰린 것을 보고 물 전파설 쪽으로 돌아섰습니다.
스노의 주장은 그가 1858년 마흔다섯 살에 뇌졸중으로 죽을 때까지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해 여름 템스강의 악취로 의회가 멈추다시피 한 '대악취' 뒤에 런던은 대규모 하수도를 지었고, 1883년 독일의 세균학자 코흐가 콜레라균을 확인한 뒤에야 물 전파설은 정설이 되었습니다. 지금 브로드 가(오늘날의 브로드윅 가)에는 손잡이 없는 펌프의 복제품이 서 있습니다.
그가 남긴 방법은 여러 길로 퍼졌습니다. 같은 1854년 피렌체의 파치니는 콜레라로 죽은 사람의 장에서 쉼표 모양의 세균을 보았지만 이 발견도 거의 묻혔고, 1883–84년 코흐가 이집트와 인도에서 같은 균을 확인하고서야 세균설과 스노의 결론이 한 이야기로 합쳐졌습니다. 숫자로 원인을 따지는 일은 반세기 뒤 골턴 연구소와 로담스테드에서 통계학이라는 학문이 되었고, 흡연과 폐암의 관계를 밝힌 힐은 1955년 스노를 기리는 글에서 그를 역학의 본보기로 꼽았습니다. 두 수도 회사의 비교는 오늘날 경제학과 역학에서 자연 실험과 '도구 변수(instrumental variable)'의 교과서 사례입니다. 도구 변수란 원인(여기서는 마신 물)을 바꾸어 놓지만, 결과(콜레라)에는 그 원인을 거쳐서만 영향을 주는 변수입니다. 여기서는 어느 회사와 계약했느냐가 그 노릇을 했습니다. 사람이 제비를 뽑지 않았는데도, 누가 어느 물을 받을지는 병과 상관없는 옛 계약이 정했습니다. 자연이 대신 뽑아 준 제비라는 뜻에서 이 이야기는 무작위성의 역사에도 들어갑니다.
이어지는 곳. 사망자 수가 아니라 비율로 비교하는 생각은 조건부 확률로, 무리를 합치느냐 나누느냐에 따라 비율의 비교가 뒤집힐 수 있다는 함정은 심슨의 역설(Simpson's paradox)로 이어집니다. 가난이나 공기 같은 숨은 원인을 가려내는 문제는 교란 변수와, 제비뽑기로 그 문제를 없애는 무작위 대조 시험으로 이어집니다. 가장 가까운 펌프로 동네를 나눈 그의 지도는 보로노이 다이어그램과, 걸어서 가는 거리를 재는 최단 경로에 있습니다. 두 양이 함께 움직이는 정도를 수로 잰 프랜시스 골턴과 칼 피어슨, 무작위 실험을 설계한 피셔, 그 방법으로 흡연과 폐암을 밝힌 오스틴 브래드퍼드 힐이 그 뒤를 잇습니다.
관계.
- 영향을 줌 오스틴 브래드퍼드 힐 — 브로드 가 유행 100주년 무렵인 1955년 힐은 스노를 기리는 글을 발표하며, 그의 비교를 숫자로 원인을 가리는 역학 연구의 본보기로 꼽았습니다.
- 영향을 줌 주디아 펄 — 펄은 『왜의 책』에서 두 수도 회사의 비교를, 실험 없이 인과(causation) 효과를 끌어내는 도구 변수의 초기 사례로 다시 읽었습니다.
연표.
- 1827년 뉴캐슬에서 외과 의사의 도제가 되다
- 1832년 탄광 마을 킬링워스에서 콜레라 환자를 돌보다
- 1836년 의학 공부를 마치러 런던으로 가다
- 1844년 런던 대학에서 의학 박사가 되다
- 1847년 에테르 흡입 마취에 관한 책을 내다
- 1849년 콜레라가 더러운 물로 옮는다는 소책자를 내다
- 1850년 런던 역학회의 창립 회원이 되다
- 1853년 빅토리아 여왕의 출산에 클로로포름을 쓰다
- 1854년 브로드 가 콜레라를 집집마다 조사하다
- 1855년 두 수도 회사를 비교한 개정판을 내다
- 1857년 빅토리아 여왕의 막내 출산에 다시 클로로포름을 쓰다
이 인물이 나오는 긴 글
이 인물을 언급하는 페이지
- 보로노이 다이어그램
… 일(분할)은 1850년 디리클레, 1908년 보로노이가 연구했습니다. 1854년 런던 콜레라 때존 스노가 집마다 가장 가까운 우물을 기준으로 동네를 나눠 본 지도가 이른 예로 자주 꼽힙니다.
- 통계학
… 세워 나라 규모의 표본 조사를 이끌었습니다. 원인을 캐는 일도 통계학의 몫이 되었습니다. 1854년존 스노는 집집이 조사해, 콜레라 사망자들이 런던 브로드가의 한 급수 펌프 둘레에 몰려 있음을 지도로 보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