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바일(Hermann Weyl)
괴팅겐에서 힐베르트에게 배워 북의 고유값(eigenvalue)에서 넓이(area)를 읽는 바일 법칙, 게이지 이론의 첫 형태, 군으로 본 양자역학을 남기고, 1921년 수학 기초(basics)의 '새로운 위기'를 선언하며 한동안 브라우어르의 직관주의(intuitionism) 편에 선 독일의 수학자.
헤르만 바일은 1885년 함부르크 근처의 작은 도시 엘름스호른에서 태어났습니다. 1904년 괴팅겐 대학에 들어가 힐베르트의 강의에 끌렸고, 1908년 그의 지도로 적분방정식에 관한 논문을 써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는 한 분야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해석학(mathematical analysis), 기하학, 정수론(number theory), 물리학, 철학을 오가며, 한 분야의 물음을 다른 분야의 도구로 푸는 일을 거듭했습니다.
나이
북의 소리에서 넓이를. 1910년 10월 네덜란드의 물리학자 헨드릭 로런츠는 괴팅겐에서 한 강연에서, 상자 속에 갇힌 빛의 떨림(고유 모드, eigenmode)이 높은 진동수(frequency)에서 몇 개인지가 상자의 모양과 상관없이 부피에만 비례함을 증명해 달라고 수학자들에게 청했습니다. 뜨거운 물체가 내는 빛의 세기를 계산하는 흑체 복사 문제에 꼭 필요한 셈이었습니다. 바일은 이듬해 이것을 증명했습니다. 평면의 북으로 말하면, 북이 낼 수 있는 음의 높이들은 라플라시안(Laplacian)의 고유값 λ로 정해지고, λ 이하인 고유값의 개수 N(λ)는 λ가 클 때 대략 넓이 A × λ ÷ 4π입니다(위의 식). 한 변이 π인 정사각형 북이라면 넓이가 π²이니 N(λ) ≈ πλ/4입니다. 북의 모든 음을 들으면 북의 넓이를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공간과 물질. 1913년 『리만 곡면(Riemann surface)의 개념』은 리만이 직관으로 그린 곡면을 엄밀한 정의 위에 다시 세운 책으로, 오늘날 위상수학(topology)의 언어가 여기서 많이 다듬어졌습니다. 같은 해 그는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ETH)의 교수가 되어 1930년까지 머물렀습니다. 1918년의 『공간·시간·물질』은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general relativity)을 다룬 초기의 교과서입니다. 같은 해 그는 중력과 전자기를 하나로 묶으려고, 길이의 눈금(게이지)이 곳마다 달라질 수 있다는 이론을 내놓았습니다. 아인슈타인은 그렇다면 원자가 내는 빛의 진동수가 원자가 지나온 길에 따라 달라질 것이라며 반박했고, 바일은 이 이론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1929년 그는 같은 생각을 길이의 눈금이 아니라 양자역학의 파동이 가진 위상(phase)에 적용해 전자기를 설명했습니다. 곳마다 따로 바꿀 수 있는 대칭에서 힘을 끌어내는 이 생각은 오늘날 입자 물리학의 뼈대인 게이지 이론의 출발점입니다(대칭과 불변량(invariant)).
기초의 위기. 1918년의 『연속체(continuum)』에서 그는 실수(real number) 전체를 이미 다 주어진 모임으로 가정하지 않고 해석학을 어디까지 세울 수 있는지 따졌습니다. 1921년에는 논문 「수학의 새로운 기초 위기에 관하여」에서 '브라우어르, 그것이 혁명이다'라고 쓰며 브라우어르의 직관주의 편에 섰습니다. 무한한 대상을 다룰 때는 '참이거나 거짓이거나 둘 중 하나'라는 배중률(law of excluded middle)을 함부로 쓰지 말자는 입장입니다(직관주의 논리(intuitionistic logic)). 스승 힐베르트는 이것을 수학의 큰 부분을 버리자는 말로 보고 크게 반발했고, 수학 전체를 형식 체계(formal system)로 적어 그 무모순성(consistency)을 증명하자는 계획으로 맞섰습니다. 바일은 뒤에 한발 물러나 더 온건한 자리를 찾았지만, 이 논쟁에 '위기'라는 이름을 붙인 사람은 그였습니다(수학 기초론 논쟁(debate on the foundations of mathematics)).
군과 양자역학. 1928년의 『군론(group theory)과 양자역학』에서 그는 갓 태어난 양자역학을 군의 언어로 정리했습니다. 회전(rotation) 같은 대칭들의 모임을 행렬(matrix)로 나타내는 방법(표현론)을 쓰면, 원자의 에너지 준위가 몇 겹으로 겹치는지 같은 물음이 대칭만으로 답해집니다. 1939년 『고전군』에서 이 이론을 정리했고, 1952년 일반 독자를 위한 『대칭』을 펴냈습니다.
1930년 그는 은퇴한 힐베르트의 자리를 이어 괴팅겐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1933년 나치 정권이 들어서자 유대계인 아내 헬레네의 처지를 걱정해 프린스턴 고등연구소로 옮겼습니다. 그곳에서 아인슈타인, 폰 노이만과 함께 첫 교수진을 이루었고, 1940–41년에는 섀넌이 그 밑에서 1년을 보냈습니다. 괴팅겐에 남은 제자 겐첸은 지도 교수 베르나이스가 쫓겨난 뒤 바일의 이름으로 박사 논문을 냈습니다. 그는 1955년 취리히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어지는 곳. 북의 음에서 넓이를 읽는 바일 법칙과 그 뒤의 흑체 복사 이야기는 「라플라시안, 가장 많이 재사용된 식」에, 램지가 말년에 바일의 직관주의 쪽으로 기운 이야기는 「완전한 무질서는 없다」에, 겐첸이 그의 이름으로 낸 논문은 「증명은 프로그램이다」에 있습니다. 그가 떠난 도시와 옮겨 간 곳은 괴팅겐과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서 볼 수 있습니다.
관계.
- 스승 다비트 힐베르트 — 괴팅겐에서 힐베르트의 지도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1930년 그의 자리를 이었습니다. 1920년대 기초론 논쟁에서는 한동안 스승의 반대편에 섰습니다.
- 영향을 받음 L. E. J. 브라우어르 — 1921년 '브라우어르, 그것이 혁명이다'라고 쓰며 브라우어르의 직관주의 편에 섰고, 뒤에는 한발 물러나 더 온건한 자리를 찾았습니다.
- 편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 1918년 중력과 전자기를 묶으려는 바일의 이론을 두고 편지를 주고받았고, 아인슈타인은 그 이론대로라면 원자가 내는 빛의 진동수가 지나온 길에 따라 달라질 것이라고 반박했습니다.
- 함께 연구 에미 뇌터 — 1930–33년 괴팅겐에서 동료로 지내며 그녀의 자리를 높이려 애썼고, 1935년 그녀가 세상을 떠나자 추도사를 했습니다.
- 제자 손더스 매클레인 — 1931년 괴팅겐에 온 매클레인은 바일과 베르나이스에게 배우며 논리학으로 박사 학위를 준비했습니다.
- 제자 게르하르트 겐첸 — 1933년 지도 교수 베르나이스가 쫓겨난 뒤, 겐첸은 바일의 이름으로 박사 논문을 냈습니다.
- 영향을 줌 프랭크 램지 — 램지는 말년에 논리주의(logicism)를 버리고, 무한을 조심해서 다루자는 바일의 직관주의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연표.
- 1885년 함부르크 근처 엘름스호른에서 태어나다
- 1904년 괴팅겐 대학에 들어가다
- 1908년 힐베르트의 지도로 적분방정식에 관한 논문을 써 박사 학위를 받다
- 1911년 고유값의 개수가 넓이에 비례한다는 바일 법칙을 증명하다
- 1913년 『리만 곡면의 개념』을 펴내고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ETH)의 교수가 되다
- 1918년 『공간·시간·물질』과 『연속체』를 펴내고, 게이지 이론의 첫 형태를 내놓다
- 1921년 「수학의 새로운 기초 위기에 관하여」를 쓰다
- 1928년 『군론과 양자역학』을 펴내다
- 1929년 게이지의 생각을 양자역학의 위상으로 다시 세우다
- 1930년 은퇴한 힐베르트의 뒤를 이어 괴팅겐 대학 교수가 되다
- 1933년 나치 정권이 들어서자 프린스턴 고등연구소로 옮기다
- 1939년 『고전군』을 펴내다
- 1952년 『대칭』을 펴내다
- 1955년 취리히에서 세상을 떠나다